



곁으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지만 당소소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숨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닌 주제에 들으란 듯이 발소리까지 내어 저를 알리고 있으니 되려 아는 척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깎아지른 절벽 끄트머리, 거기에 주저앉아 당소소는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삼켰다.
당소소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았다. 비록 당가의 여식으로 자라며 그 앎이란 것은 경험보다도 말이나 글로 배운 것에 가까웠으나 어쨌든 그는 사랑을, 연심을 알았다. 즉 제 감정을 눈치챈 이상 착각하지도 헷갈리지도 못하고 있는 그대로 올곧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무엇을 원인으로 삼아야 좋을까. 화산으로 오고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이 받아온 당가의 서신에는 언제나와 같이 가벼운 안부와 다소 멋쩍은 어릴 적 추억 이야기가 적혀있었을 뿐이다. 그걸 읽으며 멋대로 과거를 떠올리고 농을 치듯이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를 ‘만약’을 상상한 건 저였다. 그리고 오히려 당시엔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장면을 이제 와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어버린 것도 자신이었으니 달리 원망할 곳이 없었다.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웃음이 나온다 했던가. 헛웃음을 흘린다. 언제 생겨나 자란 것인지도 모를 제 감정을 직시하고 당소소의 감상은 짧았다. 내가 미쳤지.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이 있는데 왜 하필 청명 사형인 걸까. 그만 아니면 누구라도 좋았다. 어차피 화산은 혼인이 가능한 문파, 마음이 간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여겼다. 막연히 누군가와 혼인을 하는 것만이 저의 유일한 길이라 여겼던 때와는 달랐지만 그렇다고 혹 누군가에게 마음이 생긴다면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까, 이미 청혼을 했었고 답변마저 들어 희망조차 없는 그, 청명, 청명 사형만을 제외한다면 당소소는 제 마음이 누구를 향해도 좋았다. 그리 생각한들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생겨난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뒤늦게 찾아온 이 연심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정리하는 게 좋을까. 고민은 짧았고 행동은 빨랐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 다음날 당소소는 의약당에서 제가 맡은 일을 어느 정도 정리한 후 그 길로 당장 대사형, 윤종을 찾아 뜻을 전했다. 그는 아무런 전조도 없던 갑작스러운 요청에 의아한 낯을 보이면서도 순순히 요청을 받아들여 줬다. 그리고 당소소는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몸이 멀어진다고 마음도 멀어진다고 누가 말했을까. 무라는 것은 자신을 다스리는 것. 주변에 방해되는 사람 물건 그 무엇도 없는 환경에서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고 갈고 닦은 그 결과 제 마음만 더 선명히 마주하게 된 건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었다.
마음을 정리하고자 시작한 폐관수련이건만 제 의도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애틋해지는 마음을 어쩌면 좋을까. 사형은 지금 뭘 하고 있으려나, 그리 생각해버린 날에는 얼음장 같은 냉수에 머리끝까지 집어넣었다.
폐관수련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다음으로 시도한 것은, 역시나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이었다. 당가의 가문 내 행사를 핑계 삼아 사천으로 돌아갔다. 에이, 제가 거길 왜 가요. 알아서 하라죠. 그리 말하며 몇 년이고 신경도 쓰지 않았던 일이란 점은 아무래도 좋았다. 당소소가 생각하기에 폐관수련이 실패한 것은 주변에 달리 신경 쓸 것이 없었던 탓이다. 사람도 많고 의식할 것도 많아지는 당가라면 다를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걸음을 걷는 그 모든 곳에 그와 혼인하기 위해 힘을 냈던 수년 전의 당소소가 있었으니. 비록 그때의 당소소에게 있었던 것은 사랑이니 연심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진심으로 청명이라는 인물과 혼인하기 위해서 노력한 과거였다.
당시 당소소의 행동에 애정은 없었지만, 그와 혼인을 치르고 미래를 함께하게 되면 자연스레 생길 거라 막연히 생각하긴 했었다. 그래, 생겼지. 거기까지 떠올리고 허탈하게 중얼거린다. 과거의 제가 생각했던 것처럼, 미래가 된 지금 그를 향한 애정이 생기긴 생겼다. 상상과 다른 점이라면 청명이 제 부군이 아닌 그냥 사형제일 뿐이며, 반면 생겨버린 것은 전우애가 아니라 연심이라는 점이지. 결국 당소소는 여전히 제 마음을 버리지 못한 채 화산으로 돌아왔다.
“왜 왔어요?”
상대방이 부러 인기척을 낸 것처럼, 당소소가 그를 무시하고 있는 것 역시 노골적일 터인데 망설이는 기색도 머뭇거리는 기색도 없이 아예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기까지 하는 행동에 당소소는 결국 입을 열었다. 툭 튀어 나간 목소리는 제법 언짢았다.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알아서 마음을 정리해보겠다고 노력하고 있건만 도와주진 못할망정 와서 초를 치고 있으니 자연히 고운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평소엔 수련을 빠지지 않는 이상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는 일도 없으면서, 혼자 있고 싶다 하는데 왜 굳이 찾아온단 말인가.
마음은 이미 들켰다. 그렇다기보단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와 제 쪽에서 털어놓았다.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요. 끝에 그리 말해버린 것이 오히려 역효과였을까. 하지만 당소소가 아는 청명은 눈치가 좋은 것과는 별개로 이런 사적인 부분까지 개입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곱지 못한 눈초리에 청명이 다소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면서 시선을 피했다. 답지 않게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을 당소소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체 어쩌다가 하필 나를 좋아하게 된 거냐…”
“지금 누구 놀려요?”
안 어울리게 위로라도 하려는 건지 아니면 새삼 확인사살이라도 할 생각인 것인지. 어디 해볼 테면 해보라 하는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건만 한숨처럼 튀어나온 말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고, 굳이 말하자면 더 최악이었다. 그걸 알면 이 고생을 안 하지. 울컥 솟는 짜증에 당소소는 인상을 구겼다. 그냥 여기서 확 밀어버릴까 보다. 당소소가 그러한 충동을 느끼든지 말든지 청명이 하고 싶은 말은 끝난 게 아닌 듯 다시 음, 앓는 소리가 이어지다 끊겼다.
“…혼인 할래?”
“네?”
전조 없이 툭 나온 청명의 말에 당소소는 성질 내던 것도 있고 멍하게 입을 벌렸다. 아씨, 이게 아닌가. 괜히 투덜거리며 죄 없는 머리를 벅벅 긁는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미 엎은 물이요 나온 말이다. 당소소는 방금 청명이 한 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청명이 입을 꾹 다물고 잠시 시선을 사선으로 굴리다가 이내 다시 당소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다시 마주친다.
“‘성도에 좋은 찻집에 가서 차도 한잔하고, 지는 저녁노을도 같이 보다 보면 없던 연심도 생길 거예요.’”
청명이 주섬주섬 꺼내 든 문장은 언젠가 당소소가 했던 말이었다. 저걸 기억하고 있어? 그것보다 지금 그 말을 왜 꺼내는데? 혼인은? 퐁퐁 솟아오르는 의문을 꾹 눌러 삼키고 다음 말을 기다린다.
“고작 그런 것만으로도 연심이 생긴다는데, 사매랑 나는 그것보다 더 오랫동안 지내면서 많은 걸 했으니까.”
역시나 확실하지 못하게 이어지는 말꼬리에 당소소는 다시 입을 벌렸다. 세상에. 저도 모르게 나온 감탄사에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어물거리던 입이 꾹 닫힌다. 부끄러워하고 있다. 청명 사형이,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청명이.
그러나 당소소에겐 그 부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 말은 꼭, 마치, 그가 저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처럼 들리지 않는가. 착각이라기엔 그 외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그래서 당소소는 물었다.
“사형, 저 좋아해요?”
저를, 저와 같은 마음으로 보고 있어요? 이번에 불편한 기색으로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쪽은 당소소가 아니었다. 이어지는 긴 침묵에도 당소소는 자리를 피하지 않았고 그건 청명도 마찬가지였다. 기다림 끝에 결국 먼저 백기를 든 입술이 열리고, 아, 세상에 이런 청혼이 어디 있냐고 그리 생각하면서도 당소소는 끝내 웃음을 터트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