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끄응.. ” 청명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다 사정이 있었다. 아니, 사정이라기 보다는 제 사숙의 발언 때문이었다.
“ 우리도 도문인데 .. ”
“ 네? ”
“ 예? ” 그들은 백천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언제부터 도문이었냐는 듯, 아니, 지금이 화산이 도문인 것처럼 보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 도문인데 뭐? ” 순간 모두가 방금 입을 연 사람을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한 장본인은 청명이었다. 중원의 모든 이를 붙잡고 물어보면 다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화산이 이렇게 된 데에는 전부 청명이 그 원인이라고. 차라리 인성, 아니 마음가짐이 더 도사인 적은 청명이 오기 전 과거라고 할 정도로. 그런데 그 장본인이 화산을 도문이라 칭하니 화산의 이들에게는 더욱 더 충격적인 발언일 수밖에 없었다.
“ 진심이냐? ”
“ 뭐가? ” 조걸의 말에 청명이 고개를 삐거덕거리며 물었다.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 자자, 어쨌든 우리가 마냥 무력만 휘두르는 문파는 아니잖느냐. ”
“ 네? ”
“ 예? ”
이 정도까지 가자 백천도 한계가 왔는지 제 사질들의 머리를 내리쳤다. 늘 순종적이고 순수하던 제 사질들이 어쩌다 이리 되었는지 눈물도 찔끔 흘러나왔다.
“ 사숙, 웁니까? ”
“ 사형, 울어. ”
“ 우는겁니까, 시주? ”
“ 그냥 다 조용히 해! ” 참다못한 백천이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리곤 거듭 헛기침을 하더니 이내 한 가지 내기를 걸었다.
“ 서로에게 시를 지어주는게다. 이를테면 청명이 너는 소소에게, 그리고 소소는 청명이에게, 이런 식으로 말이다. 어떠냐? 그리고 가장 잘 지은 이에겐 각자 소원을 하나씩 들어주는거지. 그리고 공평하게 개방 거지들에게 투표를 맡기는거다. 이름은 비공개로 하고 말이지. 그럼 공평하지 않겠느냐? ”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다들 1등은 윤종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들은 안심했다. 시작하기도 전에. 이 생각이, 어떤 결말을 불러올지 모르고,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나 둘 붓을 내려놓았다. 하나 둘 종팔이에게 각자의 시가 적힌 종이를 건넸다. 이윽고 종팔이가 그 시들을 한 데 모아 화산오검과 사천의 당가주의 딸, 그리고 소림의 희망이자, 중원에서 강함으로는 손에 꼽을 혜연이 적은 시라 하자 많은 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
그렇게 투표가 막을 내리자 홍대광이 나와 수를 세었다. 돌멩이 수가 워낙 많아 다 세는데에 한 시진이 걸렸기에 처음 있던 이들 중 소수의 이들은 돌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선 그가 결과를 발표했다.
“ 화산의 백천, 76표! ”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아무래도 그의 헌앙한 외모가 한 몫한 듯 했다. 그는 뿌듯한 듯 제 머릴 정돈했다.
“ 화산의 유이설, 37표! ” 아무래도 시라는 것을 써본 적 없는 이설인 만큼, 쓰는데에 많이 서툴렀을 것이다. 거의 대부분이 그녀의 외모 때문에 뽑은 것이겠지.
“ 화산의 윤종, 113표! ” 모두가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는 이미 예상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쳐다보았다. 그나마 가장 도인이고, 화산의 희망이자, 화산에서 청명에게서 본심을 가장 많이 유지하고 있는 이였으니까.
“ 화산의 조걸, 7표! ”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어찌 안 터질수 있을까. 그 많고 많은 중원의 이들 중 10명도 그를 뽑지 않았으니. 그를 뽑은 이들도 동정심에서 뽑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 내, 내가 7표? 700표가 되어도 모자란데? ” 뻔뻔한 그의 말에 다들 그를 양심있이 행동하라는 듯 쳐다보았다. 그들의 표정에 머쓱해진 조걸은 거듭 헛기침을 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윤종은 그가 그의 옆으로 돌아오자 돌아온 조걸의 머리를 티 안나게 몰래 강하게 내려쳤다,
“ 걸아, 그럴 때는 얌전히 있거라. ”
“ 하지만, 사형! ”
“ 맞잖느냐. ”
“ ..확실히 사형도 청명이에게 물들었습니다. ”
“ 우리 중 안 그런 이가 있더냐. ” 윤종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쳐다보았다.
“ 흠흠! ” 시선이 그들에게로 분산되자 그는 부러 큰 소리로 헛기침을 해 시선을 그에게로 돌렸다. 다행히 금새 그들의 관심은 전부 청명의 시에 투표한 개수로 쏠렸다.
“ 화산의 청명, 177표! ” 그가 외쳤다. 화산의 이들은 모두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화산의 망나, 아니 광견, 아니아니, 100번 양보해 좋게 말해서 그는 화산의 최강자이다. 그런 그가 문예에 재능이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치 못했기에 특히 그를 가까이서 경험한 화산의 이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놀랄 수 밖에 없었다.
“ 잘못 센 것 아닙니까? ”
“ 청명이가 협박이라도 했습니까? ”
“ ..이상해. ”
“ 이게 말이 되는 결과입니까, 사숙? 저희는 이제 다 죽었습니다!! ” 조걸이 백천을 이리저리 흔들며 외쳤다. 아니, 사실은 원망에 가까웠다. 모두가 동의하긴 했으나 사실 이 조건을 내건 사람과 이 내기를 제안한 사람은 바로 그의 사숙, 백천이었으니. 그걸 이미 자각하고 있던 그였기에 그도 조걸에게 함부로 화를 낼 입장이 아니었다. 되려 그들에게 거하게 얻어맞아도 할 말이 없는 입장이었다. 그는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과거의 자신의 입을 꿰매고 싶었다. 왜, 왜 하필 그런 말을 해서. 분명 그는 윤종이나 자신이리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윤종은 모두가 알다시피 여기서 가장 온화하고 도인에 가까운 이였고, 그는 본래 도련님으로 자라왔으니 문예 또한 그들 중 한 명이 가장 우수하리라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원래 거지가 아니었던가. 거지가 시를 배울 환경이 되는가? 아니, 아무리 재능이 있다하더라도 이를 알아채고 키워주는 이가 없으면 그 재능이 꽃을 피우는 것도 불가능이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작은 희망을 잡은 채 홍대광에게 물었다.
“ 저.. 그럼 다음 소소는 혹시.. ” 그의 말에 홍대광은 다시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 화산의 당소소, 77표! ” 그와 겨우 한 표 차이였다. 백천은 놀라기보다는 제 희망이 무너진 것에 대해 더욱 더 절망한 듯 털썩 주저앉았다. 나머지 희망은 혜연밖에 없었으나, 혜연이 어찌 청명을 이기겠는가. 시를 다 쓰고 힐긋 보았을 때 그가 시를 쓴 종이는 거의 백지였으니 이를 알고 있는 백천은 도무지 희망을 걸 수 없었다. 차라리 그 때 그의 종이를 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 소림의 혜연, 14표! ” 그도 이미 자신은 망친 것을 아는지 체념했다는 듯 두 손바닥을 모은 채 조용히 중얼거렸다.
“ .. 아미타불. ”
화산의 이들은 청명이 쓴 시를 그에게서 낙아채 읽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들의 눈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의 시는 이러했다.

매우 쓸쓸해 보이는 시였다. 야몽(夜夢)이라니, 한밤중의 꿈이라는 뜻 아닌가. 그가 적은 임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이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쓴 시인 듯 했다. 그들이 청명을 바라보자 그는 머리를 긁적이며, “ 에이 씨.. 됐고, 나 잠시 술 좀 사온다. ” 그는 손을 휘휘 저으며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멀어져가는 청명이를 그져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어쩐지 그의 걸음이 평소와 달라보여서. 그런 그를 가만히 보던 소소가 그를 몰래 뒤따라갔다.
…
“ 언제까지 따라오려고? ” 청명이 뒷짐 진 채 뒤돌아보지도 않으며 물었다.
“ 사형이 이런 적이 없으니 걱정돼서 그렇죠. 평소에 잘만 지내던 인간이 왜 이런데? ” 소소가 으쓱거리며 물었다. 평소의 청명이라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오늘따라 청명이 이상했다. 그는 멈칫하더니 뒤돌아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소소의 어깨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나에 대해 아는게 뭐가 있다고! ” 그의 말에 소소는 흠칫했다. 이때까지 그의 이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었기에.
“ 아, 아프니까 일단 이거 놓고 말해요. ” 그녀가 인상을 찌푸리며 힘을 준 그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 사형이 알려주지도 않는데 내가 뭘 알아! 매번 물어도 말 안 해주는건 사형이잖아요! 그런데 우리한테 이해를 바라요? 우리가 무슨 신인줄 아는거에요? 우리가 신이야? ” 그녀가 소리쳤다. 그녀는 이미 눈치는 채고 있었다.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 그리고 활기찬 그의 내면에는 어두움이 숨겨져있다는 것을. 그녀 또한 늘 밝음을 유지했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는 청명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고, 홀로 견디고 있다는 것을. 소소는 그의 내면을 알고 싶었지만 섣불리 물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의원이다. 다친 환자가 어디를 다쳤는지 말을 해주지 않고 몸을 내어주지 않으면 그녀가 함부로 확인할 수 없듯이 청명 역시 그랬다. 하지만 그녀는 오늘, 반드시 그의 내면을 알아야겠다 다짐했다. 더 두다가는 자신의 사형이 버티지 못할 것만 같아서.
…
“ 그러니까 말해봐요. 사형, 나는 의원이에요. 외상만 고치는 의원이 아니라구요. 무엇이 어떻게 다쳤든 전 그걸 치료해주고픈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만 말해줘요. 사형, 사실 거지 아니었죠? ” 그녀의 날카로운 질문에 그는 움찔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 ..지마. ”
“ 네? ”
“ 알려하지 마. ” 이미 마음의 문을 단단히 걸어잠근 듯 그는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알려고 하지 말라니, 마치 무언가를 숨기는게 확실했다.
“ 그럼 저부터 말할게요. ” 소소는 털썩 앉아 그가 자신을 보든 말든 말했다.
“ 저는 알다시피 당가의 여식이에요. 그래서 당잔이나 패 오라버니가 비도술 같은 것을 배울 때 저는 그걸 멀리서 지켜보아야만 했어요. 그렇다고 싫은 티를 낼 수도 없었죠. 모든 여식들이 배우지를 않으니까요. 오직 남자들만 배우니까, 그게 당연했으니까요. 그래서 일부러 웃었어요. 당가주인 아버지는 힘이 없었고, 제가 거기서 반항하다가는 아버지에게 모든 화살이 돌아갈테니까. 저는 그게 싫었거든요. 제 소중한 사람이 다치는게. ”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 제 소중한 사람이 다치면 그게 제 탓 같거든요. 틀린 말도 아니고요. 그래서 억지로 웃었어요. 내면을 들키지 않으려고. 그런데 그 때 화산에서 사형들과 사고, 사숙이 온거에요. 이때다 싶었죠. 모두에게 피해주지 않고 제 사욕을 채울 방법을 찾은거에요. 그래서 전 화산으로 향했어요. 그리고 그 뒤에 초 하나 없던 제 내면이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밝은 초 수백 개가 켜졌어요. 모두가 제 사정을 알았을 때는 비참했지만 그걸 그들이 동정하지 않고 감싸줬으니까. 특히 사형도 그런 절 동정같은 걸 하지 않고 되려 그 과거들을 언급조차 하지 않으니까. ” 그녀는 가만히 서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 제 눈엔 사형은 우릴 위해 무언갈 숨기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때가 되면 말해줘요. 그럼 사형도 알게될 거에요. 그게 얼마나 행복해지는 길인지. ” 소소는 일어서 무릎을 털고는 뒤돌아섰다. 그의 마음을 듣지 못한 것은 조금 아쉬웠지만 이까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려 할 때 뒤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 .. 난 행복해질 자격 따위는 없어. ” 그 말에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언제 그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던가.
“ 왜요? ” 그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 말하자면 긴데.. 내 형과 동생, 그리고 우리 가족이 전부 한 놈에게 죽었어. 난 강했는데도 그들을 지키지 못했고. 그게 끝이야. ” 그의 말에 소소는 그를 가만히 안아 토닥여주었다.
“ 사형. ”
“ 왜? ” 얌전히 안긴 청명은 마치 작은 한 마리의 새처럼 느껴졌다. 따뜻한 온기가 그에게 전해지자 그는 가만히 소소에게 안겼다.
“ 수고했어요. 혼자 힘들었겠네, 우리 사형. ” 그녀는 가만히 그를 토닥였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게 몇 개월인지, 면 년인지는 모르지만 가족을 잃는 다는 것은.. 한 명도 아니고 모두를 잃는 다는 것은.. 그게 몇 명이든 잊기 힘든 일일테니까. 아무리 여식을 배척하는 당가라 하더라도 그녀는 그녀의 가문이 멸문한다면, 홀로 남았다면 그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홀로 살아남은 자신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 사형은 진짜 바보네요. 사형이 그런 말을 하면 우리는 되려 좋아하죠. 사형의 짐을 나눌 수 있으니까. 우리는 사형의 사형제니까. 함께 나아가야하는 사이니까. ” 그녀는 웃으며 그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 그리고 난, 사형의 정인이니까! ” 배시시 웃는 소소를 그는 빤히 바라보았다. 곱디 고운 아가씨같던 얼굴이 언제 저리 상처투성이가 되었고, 밝은 피부가 언제 저리 어두워졌는지. 그럼에도 저 미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같아서, 그럼에도 저 미소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보여서, 그도 그렇게 웃고 싶었다.
환하게.
“ 너도 참 정성이다. ” 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목에 팔을 둘렀다.
“ 가자, 기다릴라. ” 그의 말에 소소는 피식 웃으며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단풍이 붉어가는 화창한 9월의 어느 나들이에서 각자의 내면을 공유한 두 사람은 어느 때보다 진실된 웃음을 드러냈다. 그저 평범한 나들이였지만, 적어도 그들에게는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그런 나들이였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돌아온 두 사람을 반길 때 소소는 환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달려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 스스로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밝고, 환하게 진실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미소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