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사 전쟁 이후 마교발호 전 즈음의 가상 근미래 시간대를 다루고 있습니다.

연리지(連理枝)
이송백 x 유이설
天氣晩來秋(천기만래추)
날씨는 가을날 저녁 무렵에.
산산한 가을바람이 거리를 부드러이 감쌌다. 이제는 조금 서늘해진 공기 속을 메우고 늘어선 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았다. 삼삼오오 모여 이루어진 소담스러운 인파의 물결들이 낙양의 거리 곳곳을 채워 나가고 있었다. 가랑비만치 조용히 땅을 적시고 나가는 그것은, 차라리 축하연에 가까운 조촐한 축제였다. 중원을 뒤흔들던 정사 전쟁이 마침내 종막을 내렸으나, 그 누구도 감히 크게 기뻐할 수 없었기에.
전쟁의 종막은 다음 전쟁의 서막과도 같은 것이었다. 언제 발호할지 모르는 마교도를 향해 촉각을 곤두세운 수많은 이들은, 한차례의 전쟁이 휩쓸고 지나갔음에도 바스러질 대로 바스러진 마음 한 번 돌보지 못한 채 고여있었다. 데일 듯 뜨거운 불길이 휩쓸고 간 들판에 마침내 가을이 찾아왔으나 열기에 데인 화상은 나을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찾아올 시린 겨울이 먼 듯 가까웠다. 선선한 공기가 간신히 멈춰선 이들의 숨을 트이고 있었다. 이제는 이 땅에 남아 살아 숨 쉬는 이들이 찰나의 휴식을 받아들일 때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죽어간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 살아남은 이들을 위한 위령제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그들로 인해 목숨을 비호받아 화마를 피해 온 도시들이 곳곳 작은 축제를 열어 왔다. 그것은 축하연이자, 위령제였다. 겨우 거리에 등을 몇 개 새로 달고, 늘어지는 장식을 하나하나 문틀에 달아 붙이고, 거리에 노점들을 조금 핀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분명 가을의 바람이었다. 화마와 상실을 맞은 이들의 가슴을 위로하는 짙은 생명력을 머금은 바람이었다. 시리디시릴 겨울에 대한 두려움은 잠시 밀어 두고, 남은 이들은 마침내 찰나의 휴식을 맞기로 결정했다. 전쟁의 승자들이 거리로, 거리로 향했다. 그들이 살린 생명들이 생동하는 거리에.
다들 이겨내고 있구나. 불길 속에서도 놓지 않았던 희망을 여전히도 생동하는 마음에 품은 채 기꺼이 살아가고 있구나. 이송백은 삼삼오오 거리를 메운 사람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조촐하게 펼쳐진 노점상의 주위로 모인 이들의 낯이 다행스럽게도 모두 밝았다. 아픔을 딛기 위해 꾸며낸 것인지, 정말로 괜찮은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온통 일그러져 두려움을 집어삼킨 낯보다는 그것이 나았다. 아비의 품에 안겨 당과를 손에 쥐고 웃는 아이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그의 입가에도 작은 웃음이 떠올랐다.
무인 이송백은, 늘 입고 있던 정갈한 종남의 도복 대신 장식 없이 희기만 한 장포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를 묶은 긴 머리 끈이 그저 희었다. 그 위에 쓰인 흰 멱리에서 쏟아져 내려온 반투명한 천 자락이 잔잔히 바람에 흔들려 볼께를 간질였다. 얼굴을 덮은 얇은 천 너머로, 화산파 도복을 입은 이름 모를 제자들이 그들을 향해 끝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양민들 앞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멈추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가벼이 고개를 저어내었다.
간만에 찾아온 평화였다. 거리로 나온 양민들은 이 평온이 얼마나 손에 얻기 어려운 것인지 시리도록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목숨 바쳐 이 평화를 손에 넣어 돌아온 전쟁의 생존자들에게 여러모로 관심이 많았다. 그들의 희생으로 목숨을 건진 이들이니, 무엇 하나 도움이 된다면 은혜를 갚고 싶다 할테지. 혹은 그저 감사를 전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허나 이송백은 제 출신을 내세워 그 하염없는 감사를 받아먹을 생각 따위는 기필코 하지 않았다. 그들의 감사는 제 몫이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이송백이 생각하기에는, 저들의 몫이었다. 가장 앞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운 화산의 제자들. 들불 속에 누구보다 거침없이 몸을 던지던 이들. 그 참혹한 전쟁에서, 진정 영웅이라 불릴 이들이 누구인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저들만치 나아가지 못했다. 그 참혹한 화마 속에서, 그는 그저 발목을 잡지 않으려 발버둥 쳤을 뿐이다. 치미는 씁쓸함을 눌러 삼킨 입가가 작게 비틀렸다. 심장 위에 바위라도 올려둔 듯, 속이 답답했다. 이송백은 말없이 걸음을 돌렸다. 오늘은 그저 조용히, 간만의 평화를 맞이한 가을의 정경을 눈에 담아 가고 싶었다.
걸음걸음 발밑에서 흙과 모래가 뭉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 시진은 걸었던가. 눈에 비치는 낙양의 거리는 여전히 작게 생동하고 있었다. 산산한 바람에 사람들의 머리칼이 사뿐사뿐 나부낀다. 그들의 낯에 부드러운 미소들이 가득 피어올라 있었다. 간만에 기세를 피고 선 상인들이 거리로 나와 호객하는 소리가 우렁우렁 골목을 울려댔다. 더없이 일상적임에도, 지금만큼은 제법 특별한 풍경이었다.
사박사박 이어지던 걸음이 속도를 줄여 갔다. 근처에 객잔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잠시 들러 요기를 좀 해 볼까. 구석진 곳에 홀로 조용히 앉아 있는다면 그리 눈에 띄지는 않겠지. 짧은 고뇌를 마친 이송백이, 객잔을 향해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이-... 야 저 새끼 잡아!!!”
“아악 저게 진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데. 멱리 자락 아래에 감춰진 눈이 짐짓 크게 뜨였다. 우당탕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그릇이 담장을 가뿐히 넘어 하늘로 치솟는다. 그 양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선 이송백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히 질려갔다. 이제는 객잔 안쪽에서 누구의 것인지 모를 고성이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지? 싸움이라도 난 것인가? 이건... 분명 화산 분들의 목소리인 것 같은데... 빠르게 뻗어 나온 이송백의 손이, 흰 장포 자락 안에 숨겨둔 검의 자루를 움켜쥐었다. 익숙한 날붙이의 감촉을 확인한 그가 객잔을 향해 쇄도하려 몸에 힘을 주는 찰나였다.
파라락, 옷가지가 바람에 나부끼는 소리가 들렸다. 하얀 인영이 객잔의 높은 담장을 훌쩍 넘어 하늘하늘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받아야 하나? 반사적으로 팔을 뻗은 이송백을 힐끔 바라본 인영이 그의 두 손 사이로 가벼이 내려앉아 땅을 디뎠다. 어정쩡하게 흰 도복 자락에 손을 걸친 이송백의 입 새에서 경악 어린 한마디가 툭, 채 막을 새도 없이 튀어나왔다.
“...유 도장?”
“…”
얇은 천 사이로 마주친 시선이 지독히도 무심했다. 빠르게 제 좌수로 입을 틀어막았으나, 이미 상대는 제 목소리를 다 들었으리라. 놀라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어물거리는 남자에게서 깔끔하게 관심을 꺼버린 유이설이, 여전히 그릇인지 찻잔인지 통 모를 것들이 날아들고 있는 담장 너머의 객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당탕 탁자 비슷한 것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몸을 떤 유이설이 멍하니 넋을 놓은 이송백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무감하기 그지없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한 이송백이 채 입을 떼기도 전에, 유이설이 어느샌가 그의 곁으로 몸을 붙여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잡아 뒤로 꾸욱- 힘을 주어 밀기 시작했다.
“도, 도장. 왜...”
“뛰어요.”
“예?”
“뛰어.”
나긋나긋 내뱉는 목소리는 여전히도 고저가 없었으나 묘하게 다급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이 사람이 이리 급하게 구는 건... 전쟁 중에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얼결에 홀린 듯 몸을 돌린 이송백은 밀어내는 힘을 거스르지 못하고 어느샌가 그녀와 발을 맞추어 달리기 시작했다.
“유 도장. 저기서 나오신 것 아닙니까?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이리 가버리면...”
“종남이랑 화산. 싸워요.”
“예?”
“안에 청명이가 있어요. 우리 사형도.”
“아니 그러면 가, 가봐야 하는 게 아닙니까? 유 도장, 잠시만!..”
유이설의 입에서 톡 튀어나온 단어들의 배열은 간결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으나, 그 속에 재앙과도 같은 의미를 품고 있었다. 아니 그래 축제지 축제. 비록 이 도시가 종남의 속가와 화산의 속가가 모두 속해 있어 두 문파의 입김이 종종 충돌하곤 한다는 그 남영이긴 하지만… 아니 어떻게 그 철천지 원수 같은 두 문파가 대뜸 객잔 한복판에서 만났단 말인가? 좀체 혼자 돌아다니는 일이 없는 유이설이 저 안에서 나왔으니, 화산의 오검들 역시 저곳에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아무리 그들이 전쟁에서 등을 맞대고 싸운 사이라 해도, 저 치들의 종남을 향한 뿌리 깊은 혐오가 어디 가시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저 안에 설마 대사형도 계신 것은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저 객잔 안은 거진 지옥도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굴러가는 상황을 이해한 이송백이 속도를 늦추며 급히 유이설을 돌아보았지만, 그녀는 그의 시선 따위는 철저히 무시한 채 무심한 낯으로 어깨를 꾹꾹 밀어대기만 할 뿐이었다.
“멈추지 마요.”
“그... 말리기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혹여 싸움이 커지면...”
“말려요?”
방금 들은 게 당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예, 가서 말려봐야...”
“청명을?”
“...”
“걔를? 그쪽이?”
“...”
택도 없지. 이송백이 삽시간에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목 같은 이송백이라지만, 저건 태풍 수준이 아니다. 땅까지 뒤엎는 대재앙을 나무가 어찌 버티겠는가. 뿌리째 뽑혀서 뜯겨 나갈 것이 뻔하지. 시야를 가린 얇은 천을 살짝 들춰낸 이송백이 유이설의 흰 도복 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방향을 가로 틀어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예 반대편으로 가는 것이 낫겠습니다. 근처에 있다가 다른 제자들을 마주치면 곤란하니...”
“그래요.”
가벼이 고개를 끄덕인 유이설이 반걸음 뒤를 따르기 시작한 것을 확인한 이송백이 한층 속도를 올렸다. 도시 한복판에서 냅다 경공을 쓰고 달릴 수는 없으니, 최대한 빠르게 움직이기라도 해야지. 이제는 조금 멀어진 객잔에서, 사매를 찾는 백천의 비명 섞인 목소리가 언뜻 들려온 것도 같았다.
얼추 멀어진 것 같은데…
이송백의 고개가 슬 모로 기울어졌다. 곁에 선 이의 가슴께에 수 놓인 매화 문양이 얇은 천 너머로도 선명했다.
환복을 하고 나오길 잘했다. 종남의 도복을 입은 채로 화산파 도복을 당당히 걸친 이 도장의 곁에서 이미 걷고 있었다가는, 온 데만 데 종남의 제자와 화산의 제자가 살갑게 어깨를 붙이고 걸어 다니고 있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사형제들과 화산의 제자들이 저를 죽이겠다고 눈을 까뒤집고 뛰어왔겠지... 상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다 말라붙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 사람은 괜찮은 것인지. 저야 원래도 홀로 거닐고 있었으니 이리 돌아다녀도 큰 문제가 없겠지만, 유이설은 명백히 동행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유이설의 표정은 여전히도 평온했지만 이송백은 내심 불편한 마음을 쉬이 내려놓지 못했다.
“유 도장은…돌아가 보지 않으셔도 됩니까. 이 정도면 정리가 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참지 못하고 툭 튀어나온 의문이 나직이 울렸다. 유이설의 흰 낯이 기웃, 기울어진다. 그 움직임은, 아까 그 난장판을 봐 놓고도 그런 말을 하느냐 책망하는 것 같기도 했고, 질문의 저의를 알 수 없다. 의문을 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사람과 등을 맞대고 싸운 시간이 짧지만은 않았던 것 같은데, 저 무감한 표정 속에 들어있는 생각은 여전히도 알아내기 어려웠다.
“나중에. 화산으로 돌아갈 거예요.”
“음..”
“저기로는 안 가요.”
유이설이 잠시 입을 꾹 다물고 침묵 속에 가만히 눈동자를 굴렸다. 어딘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이송백은 새어 나오려는 물음을 입 안으로 꾹꾹 눌러 삼키고 가만 그녀를 기다렸다.
유이설의 걸음이 느릿하게 속도를 줄여 나갔다. 어느샌가 가만 자리에 멈춰 선 유이설이 그를 향해 몸을 돌리고, 작게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보였다. 새어 나오는 음성이 가을의 바람결만치 부드러웠다.
“그쪽은요?”
“저 말입니까?”
“함께 온 이들, 없어요?”
간결한 물음이었다. 너무 간결했기에 속에 든 의미를 채 건져낼 수 없었다. 없으면 계속 함께 걷자는 것인지, 없더라도 이제는 가보라는 것인지.
“...네. 아무래도 사형제들과 우르르 몰려다니면 너무 눈에 띄지 않겠습니까. 특히 요즘 같은 때에는요.”
“눈에 띄면 안 되나요?”
“오늘만큼은 그렇습니다. 그저 조용히, 평화로운 거리를 구경하고 싶어 나온 것이니까요.”
“아, 그래서.”
“그러니 부러 돌아갈 이유는 없습니다. 애초에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없으니까요.”
이해했다는 듯, 가벼이 고개를 끄덕인 유이설이 다시금 걸음을 떼었다. 사르르 몸을 돌리는 움직임이 물 흐르듯 고요하고, 부드럽다. 작은 등이 시야에 들이찼다. 따라오건, 그렇지 않건 구태여 신경 쓰지 않겠다는 기색이 역력한 등이.
그래 오늘은, 그저 조용히. 간만의 평화에 잠긴 중원의 풍경을 눈에 담아 가고 싶었지. 구태여 동행자를 만들지 않은 이유가 명확했으나, 그 동행자가 유이설이라면 말이 조금 달라지지 않는가. 그녀는 고요를 부르는 이니까.
다정한 시선이 늘상 무심한 등에 가 닿는다. 보폭이 큰 걸음이, 보폭이 작은 걸음을 따라잡았다. 이송백은 둘 사이를 가린 얆은 천을 조금 걷어 내었다. 희석되지 않은 검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 곧은 시선이 지독히도 투명했다.
“밥. 먹었어요?”
뜬금없는 물음이었다. 허나 그는 그 물음에 잠긴 속뜻을 건져내었다. 돌아갈 이유가 없는 것이라면, 곁에 조금 더 머물러도 괜찮다고. 온건한 승낙이자, 배려였다. 곁에 머무는 이를 위한.
“아까 그 객잔에 들러 요기를 좀 할까 했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그대로 잡혀 나온 터라. 근처에 다른 객잔이 있으니 새로운 목적지로 삼아볼까 싶습니다만... 함께 하는 이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이 먼저겠지요. 괜찮으시겠습니까. 객잔에 계셨던 것이라면 이미 식사를 하셨을 터인데...”
“괜찮아요. 가요.”
간결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그 무감한 목소리가 어쩐지 사람의 속을 가만 어루만지는 것 같기도 해서, 이송백은 그저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입니다. 안내하겠…아, 도장. 같이 갑시다.”
“빨리 와요.”
“소면,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아, 제가 부르겠습니다. 화산의 도복은 눈에 띄니...”
외양을 가리어도 무인인 것은 감출 수 없다 하던가. 종남의 도복을 벗고 신분을 감추었다 한들 저 역시도 그럴 터였다. 기감을 알아볼 수 있는 이들에게는 눈에 띄겠지. 허나 이 사람만큼은 아닐 터였다.
살짝 벌어진 멱리 자락의 틈으로 조용히 차를 홀짝이는 여검수의 모습이 보였다. 화산의 도복에, 섬서 그 어디에서도 감히 볼 수 없을 미모. 유 도장의 기척이 유독 적은 편이었기에 망정이지, 평범한 무인과 같았다면 삽시간에 온 방문객들의 시선을 독점하고도 남았으리라.
사방에서 힐끔거리는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이설은 객잔에 들어선 이후로 이렇다 할 말이 없었다. 원래도 말수가 적은 편이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송백은 마음 한켠에 자꾸만 자리를 잡고 피어오르려는 어색함을 애써 삼켜내었다.
“역시 조금 죄송스럽습니다. 저 때문에 괜히 식사를 두 번씩 하게 되신 건 아닌지...”
“괜찮아요. 아까는 제대로 못 먹어서.”
“으음...”
담장 위를 날아오르던 식기의 모습이 아직도 환상처럼 시야에 아른거렸다. 하기야 그런 난장판 한가운데서 제대로 식사하긴 어려웠겠지. 가벼이 고개를 저어낸 이송백이 부러 가벼운 목소리를 내었다.
“..그럼 다행입니다만. 소면은 원래 좋아하십니까.”
“네. 좋아해요.”
“저도 그렇습니다. 유 도장과 이리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좀 새로운 것도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전쟁 중에는 영 사적인 이야기를 나눌 새가 없었으니까요.”
“...”
이송백의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으나,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유이설의 입가는 침묵을 지킨 채 가만 굳어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조금, 불편한 기색이었다. 삽시간에 묵직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무언가 실수를 하였던가. 감정의 조각조차 내비치지 않는 굳은 흰 낯을 가만 내려다보던 이송백이 잘근,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주문하신 것들이외다.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무겁게 내려앉아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하던 찰나의 침묵이, 간신히 깨어졌다. 가벼이 고개를 숙여 감사를 건네는 유이설을 가만 바라보던 이송백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여상스레 다정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사위를 울린다.
“혹, 불편하십니까.”
제 몫의 소면 그릇을 조금 당겨 두던 유이설이 가만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 끝에 걸린 남자의 얼굴이, 어쩐지 조금 애가 타는 듯 보여, 유이설은 그저 가만 고개를 기울였다.
“저는...종남이지 않습니까. 물론 도장을 비롯한 화산의 제자들께서 저를 어느 정도 예외로 두고 계신 것을 알고는 있습니다만. 아무리 등을 맞대고 싸웠다 하여도 철천지원수와 같은 문파의 제자. 그러니 이리 단둘이 함께 하는 것이 조금은 불편하실 수 있을 듯하여.”
“...”
“...주제 넘었다면 죄송합니다. 허나 조금 전에도…분명 무언가 껄끄러워하시는 듯 보였습니다. 제 착각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영 신경이 쓰이는 통에.”
“...걱정이 되나요?”
“예. 걱정이 됩니다. 이 찰나 곁을 내어주긴 하셨으나, 그것이 어찌할 수 없는 불편과 불안을 감수하신 선택일까 우려스럽습니다. 하여 여쭐 뿐입니다.”
“...”
“혹…불편하십니까. 감수하고 계신다면 그리하지 않으셔도 된다 이야기해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외로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 말입니다.”
마주하는 시선이 짐짓 두려울 만치 투명했다. 검은 눈동자는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호수와도 같았다. 저 사해와 같은 시선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속에 감추고자 했던 이야기들을 온통 고해하고 싶어지곤 하였기에, 이송백은 부러 입을 다물었다. 고저 없는 나긋한 음성이 울려 나올 차례였다.
“걱정은 알겠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
“아까 그랬던 건, 전쟁 때문에.”
“아, 그건..”
“맞는 말인 것 같아서요. 그뿐.”
“그랬... 군요. 다행입니다.”
“그리고..”
짧은 침묵이 스쳤다.
“그쪽이 불편할 일은 없어요. 종남이라 해도.”
내뱉어지는 음성이 제법 단호했다. 늘 고저 없이 평온한 말씨와는 다르게도. 그것이 못내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것 같아, 이송백은 제 손을 한번 꾹 쥐어보았다. 저 확신의 근간은 무엇인가. 단순히 그가 화산에 호의적인 이이기에 그런 것은 아닐 터였다. 그보다는 무언가,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통 알 길이 없어서.
“그 이유를…여쭈어도 되겠습니까.”
“...”
“단순한 것이 아닌 듯하여.”
사해와도 같은 시선이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넓고 투명한 물속에, 분명한 일렁임이 일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설명하고 싶은 것이 있는 양 달싹이던 붉은 입술이 채 벌어지지 못하고 굳건히 다물어졌다. 먹고 얘기해요. 나직한 한마디가 들렸다. 나무로 된 젓가락 한 쌍이 서로 맞부딪히는 소리가 투박하게 울렸다.
이송백은, 구태여 재차 물음을 전하지 않았다. 그 망설임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 않아 생긴 것이 아님을 알았기에. 하고픈 말이 있는데, 그저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일테지. 떠오른 일렁임은 갑작스러웠으나 혼란스럽지 않았다. 바라는 것은 그저 조금의 기다림. 그리고 이송백은, 인내가 익숙했기에.
그는 구태여 재차 물음을 전하지 않는다. 대신 제 몫의 젓가락 한 쌍을 들어 올리고, 조금 전의 대화를 잊었다는 듯 가볍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늘어놓았다. 평화로이 가라앉은 선선한 가을의 공기가 흰 멱리 자락을 훑어 지나고 있었다.
明月松間照(명월송간조)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로 비추고
“잘 먹었습니다. 번창하십시오.”
점주를 향해 가벼이 인사를 건넨 이송백의 시선이 조금 떨어진 곳에 못 박힌 듯 선 검수에게로 향했다. 더... 머물러도 되는 것이겠지. 물음에 대한 답 역시 아직 듣지 못하였으니. 걷어 두었던 멱리 자락을 다시 끌어 내려 얼굴을 온전히 가려낸 이송백이 검수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섰다.
반투명한 가림천 사이로 잠시 눈이 마주치는가, 무감한 낯의 여인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큰 보폭이 작은 보폭에 보조를 맞추어 걷는다.
나긋나긋 붉게 져 내려가던 태양이 언제 산등성이 아래로 자취를 감추었는지. 휘영청 뜬 달이 내린 흰 달빛이 사위를 밝히고 있었다.
“가고자 하는 곳이 있으십니까.”
평이한 물음이 낮은 목소리를 타 바람에 흐트러진다. 걸음에 맞추어 사박사박 바스러지는 소리 사이로, 흰 낯의 검수가 가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보였다.
“네. 조용한 곳.”
고저 없는 목소리였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대부분의 음성이 그리하였듯이.
그 나직한 소리엔 사람의 마음 한구석 쌓인 뜻 모를 불안감과 호승심을 잡아 누르는 힘이 있었다.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말들이라고는, 여타 다른 이들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문장들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짧은 말 조각들일 뿐인데. 그 간결한 조각들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속 잠긴 깊은 호수 위로 평화로운 바람을 몰고 오곤 했다. 이송백은, 부러 행선지를 캐묻지 않고 그 걸음을 가만가만 따라 걸었다.
“그러고 보니... 도장과 저, 오직 둘이 함께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합니다.”
“그랬던가요.”
“예. 영 기회가 닿지를 않았던 것 같습니다. 도장도, 저도. 늘 주위에 사람이 많았으니까요. 그것이 아군이었건, 적이었건 말입니다.”
“...그랬죠.”
두 검수는 어느샌가 인적이 드문 고요한 숲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가만가만 걸음을 옮기는 여검수의 흰 얼굴 위로, 달빛이 나무 그림자를 머금고 내려앉았다. 달인지 밤인지. 차갑고도 부드러운 것들과 닮은 이의 낯이, 가을밤 드높은 하늘 아래에서 유독 희었다.
살랑이는 가을바람이 그 흰 뺨을 스친다. 달빛 같은 낯의 여검수가 흩날리는 검은 머릿결을 무심히 쓸어 넘겼다. 그 희디 흰 손에 자잘한 칼날 자국이 가득했다. 이송백은 어째서인지, 그 아름다운 낯 보다 저 여린 손에 남은 수없는 흉들이 더 시야를 잠식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인간이라기엔 차라리 천인에 더 가까워 보이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검수의 손에 남은 흉터들이 그녀 역시도 그저 수없이 사지를 헤쳐 나온 한 무인일 뿐이라 외치는 것 같았기에.
저 손은 수없는 사선을 넘어온 이의 손이다. 얼마나 많이 날붙이가 저 손을 베고 또 베어왔을까. 그 역시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며 살아왔다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전장 한복판에서 화마를 뒤집어쓰고 나서야 깨닫지 않았던가. 사선을 넘고 한계를 넘어서 온 이는 제가 아닌 저 검수였음을. 저 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마음으로 검을 잡고 있는 것인지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그 삶의 궤적을 차마 물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이방인이었기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건네는 낮은 목소리가 사위를 채우는 사이, 유이설의 걸음은 차츰 속도를 줄여 나가기 시작했다. 어느샌가 멈추어 선 그녀의 한 치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애초에 목적지는 이곳이었다는 듯, 흔들림 없이 오직 정면을 향하던 시선이 휘어졌다. 돌아선 그녀의 앞에 숲이 늘어져 있었다. 넓고, 깊은. 소나무 숲이.
“...여긴..”
“아까, 질문.”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멈추었으나 그에게로는 향하지 않은 먹빛 시선이 모로 기울었다. 그 시선 끝에, 소나무 숲이 있었다.
숲을 향해 몸을 돌리고 선 그녀의 앞에서 작게 물이 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색 윤슬이 일렁이는 시냇물 위로, 형화 무리가 유영한다. 달빛이 내린 깊은 숲, 은색 물길에 파고든 반디 무리의 나긋한 빛무리가 마치 별빛이 내려온 듯 아름다웠다. 사해와 같이 깊은 투명한 눈동자에 일렁이는 형화의 빛이 담겼다. 그 모습이 문득 아름다워, 이송백은 멱리 자락을 온전히 젖혀 시야를 깨끗이 열어 내었다.
“불편하지 않아요.”
“이유를 다시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별빛 눈동자에 검은 숲을 담고 선 검수가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서로 부딪혀 포말을 이는 시냇물 소리가 청량했다.
“닮았어요.”
“...무엇이..”
“그쪽이. 나와.”
새어 나온 음성이 나직이 가라앉아 있었다. 드러난 흰 낯에 어떠한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거늘, 어쩐지 그 모습이 바스러질 듯 아스라해 보였다.
“제가... 유 도장과 닮았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예전의 나와.”
이송백의 곧고 단정한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그저 의문이었기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어떤 점을 닮았다 하시는 것인지...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습니다. 부디 이유를 알려 주십시오.”
어쩐지 조금 애가 탔다. 뜬금없는 대답을 내놓은 그 간결하고 잔잔한 음성에서, 손에 채 잡히지 않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툭 튀어나와 심장께를 짓누르는 것 같았기에.
“사질에게 들었어요. 종남의 검을 좇는 이.”
“그건...”
“그쪽밖에 없으니까. 그럴 만한 사람.”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제가 검을 좇는 것이, 도장과 닮았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송백은, 소나무 숲 앞에 선 이래 제게로는 단 한 번도 향한 적 없는 먹색 눈동자가 높디높은 소나무들을 제쳐 올라가 별빛이 수 놓인 하늘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유이설의 붉은 입술이 작게 달싹이는가 싶더니, 그 새로 나직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저어지는 고개에 흑단 같은 머리칼이 부드러이 흔들렸다. 뱉어지는 음성이 똑, 똑, 빗 망울처럼 떨어진다.
“…미련하고, 독한 것이.”
“...무슨,”
“이제는 볼 수 없다, 잊혀졌다 여겨지는 것을 좇고 또 좇는 것이.”
“...”
“미미한 희망을, 어쩌면 평생 손에 잡지 못할지도 모르는 것을 잡고 내달려, 여기까지 온 것이.”
“...도장.”
“닮았어요. 나랑.”
아, 이것은 그녀의 고해렸다. 걸어온 검수의 길. 시작과 끝이 다른 두 무인의 길이, 그 결만은 같았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나도 너처럼, 어쩌면 평생 손에 쥐지 못할 것을 맹목적으로 좇으며 나아갔다고. 잃어버린 검. 좇고 좇으나 사라져 잃어버린 긍지. 아득히 멀어 잡힐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목표.
그가 청명이라는 혜성 조각에 쌓아 온 것들을 우수수 잃어 보고서야 깨닫고 좇아 온 것, 그 멀고 먼 목표를. 이 검수는 언제부터 좇고 있었던 것일까. 그 길은 얼마나 외롭고 고독했을 것인가. 무너져가는 도문, 피우는 이 없었던 매화. 허면, 저 무감한 껍데기 속에서 드러난 이 한치의 외로움은 그 괴로운 시절의 표상인가.
흰 검수의 반걸음 뒤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이송백이 문득 걸음을 디뎠다.
유이설의 곁에 나란히 어깨를 붙이고 선 그는 가만 고개를 기울여 다정한 눈동자에 작은 인영을 담았다. 물가를 맴돌던 반디들이 어느샌가 흘러들어와 그녀를 둘러싸고 은은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달빛과 형화를 온몸으로 받고 선 유이설이, 그제서야 다가온 온기의 주인에게 시선을 옮겨 주었다.
“…그저 버티었을 뿐입니다.”
남자의 다정한 음성을 태운 가을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꺾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평생 입에 올리고 살아야 할 ‘도’ 에 한 걸음 다가서려면, 이 한 마음 수치스럽지 않으려면, 그저 더욱 견고하게 땅을 디디고 버티고 또 버티어야 했으니까요. 제 입으로 뱉은 것, 이루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으니까.”
“...”
“그저 그뿐이었습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고 싶지 않아서. 옳다 여기는 것을 개척하고, 잘못되었다 여기는 것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 도가의 사람이 도가의 품에서 편히 밥을 얻어먹고 편히 잠을 자며, 그저 편히 도를 좇은 것뿐입니다. 헌데 어찌 도장에게 비할 수 있겠습니까? 손을 덮은 상흔도, 도장이 저보다 배는 더 많습니다.”
무표정한 흰 낯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미미하게 찌푸려진 미간이 모습이 영 생소했다.
“이해, 못했어요?”
“이해하였습니다. 허나, 그저... 저보다는 도장이 더욱 강인한 분이신 듯 하여서. 닮았다 인정하는 것이 조금 죄스러워 그렇습니다.”
사해와 같은 눈 안에 떠오른 저 포말의 이름은 책망인가, 갑갑함인가. 그가 구태여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차가운 힐난이 섞인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이송백의 입가에서 결국 작은 침음성이 새어 나왔다. 가볍게 아랫입술을 물어낸 유이설이 고개를 툭, 정면으로 돌렸다. 달싹이는 입술에서 내뱉어지는 목소리가 작디작았다. 혹여 시냇물 흐르는 소리에 저 음성이 잠겨 사라질까 싶어, 이송백은 저보다 작은 여자를 향해 슬 몸을 숙였다.
“나도 그랬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나도. 그저 버티었을 뿐이에요.”
“...”
“그냥. 버티고, 나아가고. 멈출 수는 없으니까. 그 길 밖에는 없으니까.”
“...유 도장..”
“내 길, 더 무겁진 않아요.”
유이설은 상흔이 가득한 흰 손을 가만 끌어올렸다. 가슴께까지 끌어올려진 그 기다란 손에 삶의 흔적이 가득했다. 혜성을 만나기 전에도, 만난 이후에도. 한순간도 날붙이를 놓지 않았던 것. 삶의 궤적이 상처를 남기면, 그것은 상흔이 되었다. 그렇게 빼곡히 이 손을 채워 왔다. 그저 그 시간이 길었다. 상처를 입을 시간이. 상처가 상흔으로 새겨질 시간이. 그저 그럴 일이 많았던 것뿐이다. 태어난 순간부터 통 조용할 일 없는 삶이었으니까. 상처를 입을 일이. 상처가 상흔으로 새겨질 일이 많았다. 누군가는 이 빼곡한 상흔들을 두고 영광이라 하겠으나, 유이설에게 이것은 그저 삶이었다.
“그저 내가. 조금 먼저 걸었을 뿐.”
한순간도 마음 놓을 일이 없었던 삶의 궤적. 이르게 찾아왔던 아픔들. 그저 그뿐.
“그리하여 나 역시도, 피어나고 있을 뿐. 이제서야.”
“...”
“그러니, 닮았어요.”
淸泉石上流(청천석상류)
맑은 샘은 바위 위로 흐른다.
곧은 시선이 삶의 상흔을 넘어간다. 투명한 눈에 검은 소나무 숲의 바닥이, 부드러우나 단단한 흙바닥이 비추어진다. 그 눈동자에 비추어진 것은 이내 휘어지고 꺾였을지언정 부러지지 않고 선 굵은 나무 기둥이 되었다. 널리 손을 뻗어 땅을 가린 얇은 가지들이, 얼기설기 하늘을 가리고 선 잎들이 되었다. 유이설은 제 곁에 선 구름의 무인이, 저 나무를 닮았음을 알았다. 그의 삶이, 제 손을 새긴 상흔 보다는 저 나무에 새겨진 상흔에 더 가까운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달라요.”
“닮았다 하시지 않았습니까.”
“온전히 같은 것은 아니니까. 닮았지만 달라야만 해요.”
“무슨...”
“나는 피어나야 하지만, 당신은 뻗어가야 하니까.”
그래 그래야 한다. 멀고도 먼 검을 좇는 것. 그 곧고 무거운 목표. 그를 위해 버티고 버텨 내딛는 한 걸음. 그 결은 분명 과거의 그녀가 밟아온 길과 닮았지만, 그의 뿌리는 그녀와는 달랐다. 그녀는 매화가 되어야 하나, 그는 소나무가 되어야 했다. 다른 나무였다. 같은 폭풍을 맞고 같은 비를 맞는다 한들, 다른 뿌리였다.
“...도장.”
“송(松) 이니까요.”
뻗어가야 한다. 곧디곧은 이송백의 시선이, 유이설이 바라보고 선 소나무를 향했다. 부드러운 흙 알갱이가 모이고 모여 단단히 고정된 땅. 상흔을 입을지언정 부러지지 않은 나무 기둥. 뻗어나간 얇은 가지들, 그 끝에 달려 하늘을 얼기설기 가리고 선 잎.
송(松) 이었다.
무언가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은데, 통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간신히 떨리는 목께를 쥐어짜면, 온전한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이 툭 툭 떨어져 나왔다.
“송(松) 이라...”
“네.”
“뻗어가야... 하니까.”
고저 없는 목소리는 언젠가부터 무심한 기색을 되찾고 있었다. 허나, 알 것만 같았다. 무심한 껍데기를 둘둘 두르고 선 저 검수의 속이 얼마나 섬세한지. 그 섬세함이 얼마나 다정히 주변을 살피고 있는지. 그녀는 그 삶에 침범한 시간이 결코 길지 않은 이송백의 길마저도 세세히 들여다보고, 동시에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 깨달아버린 사실이 그의 가슴 한켠을 무겁게 울려 왔다.
“그렇기에…닮았으나 다르다는 것입니까.”
“달라야 해요.”
“...”
“다른 나무니까.”
찬기를 머금은 가을 공기가 부드러이 뺨을 스쳤다. 그것을 타고 온 잔잔한 목소리가, 어쩐지 조금 간지럽고,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이송백이 좌수를 들어 따끔거리는 제 가슴께를 꾸욱 잡아 눌렀다. 다른 나무. 그 간결한 말에서 이 관계의 넘을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같은 도문에 있었다면 저 무심한 검수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조금은 쉬웠을까. 드넓기 그지없는 저 이해를 온전히 받아낼 수 있었을까. 저 평이한 목소리에 이끌려 걷다 보면, 어쩌면 조금은 더 먼 곳까지…나아가 있지 않았을까. 의미 없는 생각들이 뇌리를 메웠다.
이 기묘한 아픔은 아쉬움에 기반한 것일까. 이제는 제 곁을 채우고 선 사형제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이송백의 길은 분명 외로운 것이었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길을 이해하는 사람의 부재가 길었다. 제 속에서는 사실 그 존재의 갈망이 제법 길었음을 알았다. 그래. 이것은 아쉬움이다. 같은 방식으로 걸어온 이와 온전히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는 것을 인식한 데에서 오는 것이었다.
허나 이송백은, 그저 아쉬움을 삼키고 멈추어 서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연을 바라보고만 있는 성정은 되지 못했다. 아쉬운 것이 있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손에 넣는 길이 험하고 막막하더라도 그저 묵묵히 걸어야만 했다. 이송백은 인내를 아나 포기는 모르는 이였기에.
그는 맞닿은 온기를 향해 가벼이 무게를 실었다. 갑작스레 기대어지는 무게감에 가벼이 몸을 떤 흰 검수가 시선을 돌려 왔다. 허리를 숙이고 있던 이송백의 시야에, 흰 낯이 가득 들어찼다.
“그거 아십니까?”
구태여 피하지 않은 유이설의 투명한 눈동자가 지척에 있었다. 숨이 막힐 듯 고요한 눈동자를 마주한 이송백의 입가가 나직한 호선을 그리며 벌어졌다.
“소나무는 백자를 넘게 자라고는 한답니다. 그리 한참, 한참을 자라면서도 가지를 뻗어 주위를 덮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잎이 가늘어 높은 하늘을 온전히 가리지는 못하지만, 가지를 빽빽이 내어 딛고 선 땅 위에 그늘 한 조각을 만들어 냅니다.”
“...”
“그러니 매화나무의 위에도, 그늘 한 조각 만들어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인의 어여쁜 눈매가 가느스름하니 접혀 들어갔다. 이송백은 그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얼기설기 뻗은 가지와 잎으로 찬 바람과 쏟아지는 눈을 막아주면서요. 허나, 매화나무가 피워낸 꽃잎이 하늘로 나부껴 올라가는 것은 막지 않을 겁니다. 소나무는 높게, 높게 뻗어나갈 뿐이니까요. 그렇게 굳건히 서 있다 보면, 어쩌면 한 번 즈음 불어오는 겨울의 폭풍에서 매화를 지켜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다른 나무이기에. 그리할 수 있을 겁니다.”
다정한 미소가 살풋 짙어진다. 혹여 이 대화가 상대에게 부담이 될까, 조심스러운 눈치였다. 그저 그리 생각할 뿐이라는 듯,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한의 진심을 그려낸 이송백이 조금 장난스러운 어조로 다시금 입을 열었다.
“물론 저도 온전한 소나무라 불리기엔 아직 작고 부족하지만요. 아직 어려 덜 자란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허나 버티고, 견디고, 뻗어가 제대로 된 나무 한 그루가 된다면, 언젠가는 그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다.”
동경인지, 존경인지. 혹은, 다른 무언가인지.
그는 가슴 한 켠에 피어나 소담스레 번져 가는 꽃내음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허나 그것이 퍼지며 마음 곳곳을 따스히 데우는 것이, 못내 간지럽고도 기꺼웠다.
“물론 그리될 때까지 제가 유 도장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겠지요. 부단히 노력해보겠습니다. 종남의 제자라고, 뿌리가 다른 나무라고 그대가 저를 멀리하는 일이 없도록.”
고요히 가라앉은 호숫가에 작은 파장이 일듯, 차츰 멍해지는 흰 얼굴 위로 가을바람이 내려앉았다. 사부작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을 가만 바라보던 이송백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허공을 유영하는 부드러운 가닥들을 모아 하얀 귀 뒤로 넘기어 주는 큰 손이, 그녀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상흔이 가득한 손이었다. 그녀의 것과 딞은, 그러나 다른, 무인의 손이었다.
“멀리할 일, 없을 거예요.”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웃는 낯이 지독히도 다정했다. 그 순한 다정을 눈에 담던 유이설은, 말없이 그저 몸을 돌리고, 한참 전에 멈추어 두었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좁은 길목의 가로 붙어 선 그녀가, 곁에 한사람분의 공간을 내어 주었다. 이송백은 그 행동이 그녀만의 언어임을 알았다. 온전한 제 공간을 찾은 큰 보폭이, 작은 보폭에 보조를 맞추어 걸었다.
연리지(連理枝)
“돌아가요.”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나를?”
“멋대로 내뱉은 이야기들을 들어주신 값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그리 해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산문 앞까지 함께 했다가는 제 목숨이 무사하지 못할 것 같으니… 산의 초입까지만이라도 함께 하겠습니다. 혹, 어렵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다행입니다. 그럼 잠시간만 더 함께 하겠습니다.”
“네.”
“아 그리고, 다음에... 다음에는,”
말끝이 늘어졌다.
가만 돌아보는 투명한 시선이 여전히 사해와도 같이 깊었다. 허나, 그는 이제 저 호수에 이는 포말의 이름을 알았다. 그 사실이 못내 기꺼웠다. 그녀의 알 수 없는 속을 조금은 들여다본 것이…그 깊은 이해가 제 마음을 파고든 것이…
이 하룻밤의 대화가, 이 마음이…그저 달 아래 한순간의 찰나로 남지 않았으면.
“제가 감히,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그냥 그런 마음이 들어서.
작은 보폭이 걸음의 속도를 늦춘다.
그의 마음속을 온통 들여다보려는 듯, 시선이, 검은 파도와 같이 밀려 들어왔다.
깊었다. 그저 깊었다. 그 깊은 물결이 제 속을 온통 파헤치고 지나가는 것만 같은데, 이상하게도 그것이 참 기꺼웠다.
그래, 그렇게 온통 헤집고 머금고 있던 달빛 한조각 제게 남겨 주었으면. 그러면, 나는 그것을 들고 당신을 찾아가 이 달 조각 받아 가기 위해 저와 다시금 함께해 달라 사정할 수 있을 테니까. 웃음기를 머금고 가만 기다리고 있노라면, 굳어 있던 어여쁜 붉은 입술이 미미하게 달싹였다. 새어 나오는 말씨가 동요 없이 평이했다.
“...네.”
사형제들에게는 들키지 말고요. 내 사형제들에게도. 작게 덧붙여진 문장이 간지러워, 이송백의 입가에 푸스스 잔웃음이 번졌다.
여인이 다시금 걸음을 떼었다. 곁에 다가서 속도를 맞추는 움직임이 조금은 익숙해진 것도 같았다.
들이켠 숨에, 폐부로 차오르는 가을밤의 공기가, 조금은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