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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궁도위는 이 풍경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죽음만 남겨졌던 산이다. 한 하늘 아래 함께 했던 이들이 무력하게 쓰러졌던 그 산임을 남궁도위는 기억했다. 하지만 상념에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으므로 남궁도위는 다시 발을 옮겼다. 팔에는 댓가지로 엮은 광주리가 걸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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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거부

남궁도위 × 유이설

 

 

1

 2차 정마대전이 막을 내린지 이 년이 지난 가을이었다. 거리에는 절망이 아닌 웃음소리가 피어나고, 사람들은 피로 물든 대지에서 피어난 석산이 아닌 비옥한 토지에서 피어난 들꽃을 엮어 화관을 만들었다. 이 년이 지났으면 평화가 피어날 시기지, 하고. 남궁단이 스쳐지나가듯 이야기 했던 말을 남궁도위는 기억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며칠이더라. 멀지 않은 날이 상강인 것을 기억해낸 남궁도위는 가만히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러고 보니, 작년 이 시기에는 지나가던 개방 거지들은 물론이오 온 천하가 웃으며 축제를 열며 천마의 죽음에 기뻐했었다. 정마대전이 완전히 종결이 났다고 했던 시기였지. 정작 천우맹 사람들은 천마의 목을 벤 그 날의 기억이 없었다. 바쁘고 혼란스러웠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지독한 흥분감에 뇌가 절여졌거나. 그리고 그것은 이 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좀 다른 의미이긴 하겠지만 말이다.

 화산의 문턱에 발을 들인 남궁도위는 순간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굵은 사과알을 쥐었다. 은하상단과 사해상회에서 고심해서 고른 사과가 이렇게 땅을 구르고 있는 걸 알면 천우맹주가 크게 호통을 칠 것이 분명했다. 허나 천우맹주가 소리를 치기는 커녕, 각 가문의 수장들이 함께 난장판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본 남궁도위는 뒷목이 당겨왔다. 이 시기만 되면 그들은 평소의 몇 배나 시끄러워진다. 그것이 죽은 이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하는 행동인 것을 그가 알고 개방이 알며 온 천하가 알았다. 어쩌면 저 명계 너머의 사람들이 알 수도 있겠군. 나직하게 읊조린 남궁도위가 궤짝에 담긴 사과 한 알을 더 집어들었다. 그 다음으로는 월병 두어 개, 마지막으로 독한 백주 두 병. 그리고는 구석에 있는 광주리에 그것들을 담고 상황을 구경 중인 당군악에게 향했다.

 

“여전히 시끄럽군요.”

“아무래도 그렇지. 이 년이나 지났으면 좀 울 법도 한데 말이야.”

 

 하지만, 그리 말하는 우리도 울지 못하는 걸요. 남궁도위의 말에 당군악이 미소 지었다. 그 광주리는, 이번에도 십만대산에 갈 생각인가? 예, 그리 해야죠. 돌아오지 못하는 화산의 혼이 그곳에도 있으니까요. 그들은 죽으면 제 혼이 화산으로 돌아올 것이라 확신하던데. 아무리 그래도 마공에 몸이 녹아버린 몸이 제대로 된 길을 찾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올 수 있게 안내자가 있는 편이 옳은 선택이지 않을까요. 남궁도위의 중저음 목소리가 울렸다. 당군악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번이 마지막일세. 다음에는 녹림왕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게나. 하하, 녹림왕 말입니까. 남궁에 어떤 빚을 지워둘지 상상이 되질 않는군요. 검협이 눈치를 챘어. 나도 이젠 숨겨줄 수 없네.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밤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당 가주. 그리 말한 남궁도위는 몸을 돌려 산문으로 향했다. 당 가주를 제외하곤 알 수 없을 완벽범죄였다.

 

2

 남궁도위는 산 아래로 내려와 말에 올랐다. 차라리 경공을 밟을까 싶었지만, 그건 말이 지치면 그때 하는 것으로 하고. 남궁도위는 고삐를 당겼다. 섬서에서 내려가는 것이니 속히 내려가야 했다. 간만에 가는 길이라 몇 군데를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 하지만 남궁도위는 말을 타고도 빠르게 이동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천우맹 사람들은 녹림과 다를 바 없이 산길을 잘 찾을 수 있게 되었고, 그들 중에는 남궁도위도 포함되어 있었다. 남궁도위는 순식간에 장강 어귀에 도착해 미리 빌려둔 배에 말과 몸을 실었다. 와중에도 광주리 안의 음식은 멀쩡했다. 남궁도위는 그 사실에 안도하는 사이 배는 부두에 닿았다. 호남은 과거 무너진 기억과 달리 사람이 살고 객잔이 밤 늦게까지 운영한다. 지쳐 달리지 못하는 말을 바라보던 남궁도위는 결국 객잔에 발을 들였다. 경공을 밟을 수 있었으나 허기가 밀려오는 탓이었다.

 

 식사는 간단했다. 화음의 것과 비슷한, 채소와 멸티를 넣은 육수에 데친 소면을 넣은 것. 그리고 네모낳게 썬 무에 매운 양념을 한 반찬거리. 화산의 제자들 중에서도 누군가 생각나는 맛에 남궁도위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한결같은 사람. 그래서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그를 생각함과 동시에 입맛이 뚝 떨어진 남궁도위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하곤 탁자에 은자 주머니를 두며 점소이를 불렀다. 날이 늦었으니 하루 머무를 방을 내어주게. 곧 점소이가 그를 안내했다.

 

 방을 얻은 남궁도위가 발을 옮긴 곳은 욕탕이었다. 물을 담은 통에 몸을 욱여넣고, 그대로 쭈그려 앉아 고개를 숙인다. 남궁도위는 언제나 감정 어린 고백들을 받아왔다. 누군가는 그가 보이는 검에 찬사를 보냈으며, 누군가는 운명을 가장하고 그에게 연서와 청혼서를 보내었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그것들이 진심이 아닌 것을 진즉 알았고, 그것들을 멀리했다. 하여 남궁도위는 사랑을 잘 몰랐다. 알아도 그것은 그저 인간으로 남기 위해 가지고 있던 최소한의 가족애였다. 그런 남궁도위는 불현듯 깨달아 버린 것이다. 유이설에 대한 감정을. 세상에 이런 바보도 없다. 누가 전쟁 중에 그 연정을 자각한단 말인가. 이보다 멍청한 놈도, 미친 놈도 없다. 하아... 한숨을 깊게 내쉰 남궁도위가 몸을 일으켰다. 대충 물기를 닦은 후, 이불을 깐 와상에 누웠다.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어째 취한 것 같은 기분을 뒤로하고 남궁도위는 눈을 감았다.

 

3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남궁도위는 눈을 떴다. 그리고 곧 제 눈을 의심했다. 객잔의 천장이 아니라 동굴의 천장이다. 그리고 남궁도위가 몸을 움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은, 꼭 과거의 기억을 되짚는 듯싶었다. 동굴 밖으로 나간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멈추었다. 숨이 들이켜진다. 간만에 보는 얼굴이다. 남궁도위가 천천히 달 아래로 다가갔다.

 

“이설 도장. 불침번은 이만 제가 서겠습니다. 조금이라도 눈 붙이세요.”

“괜찮아요. 아직. 더 할 수 있음.”

 

 ...그 날의 기억이다. 타들어가는 남궁도위의 속과는 다르게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럼 함께 눈을 뜨고 있겠습니다. 고집 불퉁. 남궁의 검은 무거워요. 전투를 위해서 쉬어야 함. 남궁의 검법이 무겁게 느껴지십니까? 남궁도위가 내뱉은 한 마디에 유이설이 벌떡 몸을 일아켰다. 동굴 앞쪽은 너른 들판이었으므로, 남궁도위는 달 아래 유이설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화산의 검법은 무형. 형상에 얽매이지 않아. 우리가 매화가 되고자 한다면 매화가 됨. 하지만 난초가 되고자 하면 난초가 돼.”

“...네?”

“화산의 검법은 피어남이야. 형상에 얽매이지 않고 피어나면 돼. 그것이 본질. 그렇다면 남궁의 본질은?”

“남궁의... 본질, 말입니까.”

“화산의 피어남, 종남의 우직함, 무당의 속력. 그렇다면 남궁은 뭐야?”

 

 남궁도위는 머리를 얻어 맞은 것 같았다. 남궁의 본질은 무엇인가? 제왕검형의 본질은, 그 백색 검기의 본질은 아버지인 남궁황 조차도 깨닫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의 선조들은 하나같이 검을 가르쳤을 뿐, 그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렇기에 사람을 흔든다. 그래서 남궁의 선조들은 그것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허나 남궁도위는 달랐다. 그는 질문을 되짚어 그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남궁의 검을 만든 자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는 남궁의 검에 어떤 본질을 담았나? 그 본질은 어떻게 변화했나? 흐트러진 생각들이 머리를 아프게 할 때쯤, 머리 위로 손이 얹어졌다.

 

“남궁의 본질은 변화. 제왕검형은 매화검법과 닮았어. 무형이므로 특출난 것은 없지만 무형이기에 변화한다.”

 

 남궁도위는 유이설에게서 청명을 보았다. 그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이다. 남궁도위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가 멍을 때리는 사이 유이설은 그에게서 멀어져, 검을 뽑았다. 그녀가 오백, 천, 천 오백, 이천, 이천 오백 그 이상을 휘두른 달의 검이 그녀의 손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춤을 추듯 그려지는 검무에 남궁도위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내 검이 변화했다. 부드러움이 사라지고 묵직함이 실렸다. 연한 홍매화빛의 검기가 흙을 파내고 검날을 손상시킨다. 하지만 유이설은 멈추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이 검은, 언뜻 보면 화산의 검이나 그 속에 실린 것은 남궁의 것. 유이설은 남궁도위의 검을 보고 그것을 닳도록 외웠다. 그렇게 외우다 잠이 들면, 유이설은 꿈에서 검을 휘둘렀다. 닳도록 외운 남궁의 검을 그린다. 꿈에서 유이설은 화백이었다.

 

 유이설이 검을 휘두를수록 매화가 바스라졌다. 매화가 바스라질수록 휘두르는 검에는 위압감만 실렸다. 하얀 풀을 밟고 유이설은 붓을 놀린다. 숨이 찰지언정 유이설은 멈추지 않았다. 화지가 먹으로 가득 물들고 있었다. 얼마 남지 않은 끝에서, 유이설은 상단세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내리찍는다. 검이 땅에 박히고, 뻗어나간 백색의 검기가 커다란 길을 만든다. 언젠가 남궁도위가 그렸던 검이다.

 

“신중함이 많아. 그걸 덜고 무형을 취해. 공백은 내가 매꿔.”

 

 이제 자. 유이설이 남궁도위의 눈두덩이에 손을 올리고 눈꺼풀을 내렸다.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뺨을 스치면 남궁도위는 다시 생각한다. 정말 최악이라고.

 

4

 육중한 몸이 일으켜졌다. 다시 현실의 감각이었다. 하필이면 그런 꿈을 꿔서, 당신은 꼭 이런 날 나를 제정신으로 두지 않는다. 들릴리 없는 원망을 내뱉으며 그의 입꼬리가 잠시 올라갔다. 그래도 오랜만에 나와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얼굴은 안 까먹을 것 같습니다. 객잔을 나오면 남궁도위는 가까운 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먹고 사는 화백을 찾았다. 그리고 전낭 주머니를 던져주며 그림을 그려달라 부탁하고, 잠시 후 나온 그림을 말아 광주리에 넣고 다시 말에 오른다. 진정으로 얼마 남지 않은 거리였다. 남궁도위는 고삐를 당겼다. 다시 십만대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묵직한 마음에 비해 가벼웠다.

 

 정신없이 달리던 말이 어느 한 구석에 멈춘다. 남궁도위는 이 풍경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죽음만 남겨졌던 산이다. 한 하늘 아래 함께 했던 이들이 무력하게 쓰러졌던 그 산임을 남궁도위는 기억했다. 물론, 그 때와 다르게 전부 빠졌던 풀들은 다시 자랐고 이젠 그 사이에 들꽃마저 자란다. 나무들은 각가지 색으로 물들어 푸른 들과 함께 했고, 그 사이에서 남궁도위는 이질감 없이 섞여들었다. 그는 들꽃과 같은 하얀 백의를 입고 있었다. 답지 않게 기분이 들떴다. 곧 그의 걸음이 작게 솟은 고분에 닿았다. 남궁도위가 산뜻한 인사를 건네었다.

 

“간만입니다, 이설 도장.”

 

 올해도, 당신과 약속한 가을 나들이를 왔어요.

 

6

“도위.”

 

 유이설이 나직하게 그를 찾았다. 청명이 함께 출정하라 보낸, 이미 교주로 인해 폐허가 된 마을에서 유이설은 그에게 물었다. 나들이가 무엇이냐고. 남궁도위는 잠시 망설였으나 그것은 소중한 사람들끼리 먹을 거리를 싸서 놀러 나가는 것이라 답했다. 놀러 나가는 것... 잠시 되읽던 유이설이 다시 질문했다. 그럼, 니들이가 취소되는 경우는? 이번에도 남궁도위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가족에게 일이 생기면, 아무래도 나가지 못하는 편이죠. 그럼 저 아이는? 어떤 경우? 남궁도위가 시선을 돌렸다. 무너진 건물 아래 깔린 부모와 겨우 나온 손을 잡고 우는 아이. 아이는 부모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듯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며 어서 일어나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부모가 죽은 경우죠. 아이가 잘 자라 가족을 꾸리지 않는 이상 가을 나들이를 가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에 유이설이 침묵했다. 아이를 향한 동정일까, 아니면 다른 감정일까. 남궁도위는 그것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과거 화산은 위태로웠고, 우이설도 그 때문에 나들이를 가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고 며칠 이후, 유이설이 마을을 초토화 시킨 교주를 찾아 목을 베었다. 남궁도위의 묵직함 검이 유이설의 도약을 도울 것이라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남궁도위가 훌륭하게 보조한 덕에 유이설은 교주의 목을 베며 화산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자신도 남궁으로 잠시 돌아가 그들을 통솔하다 다시 전쟁터로 나오갰지. 남궁도위가 그리 생각하는 순간, 유이설이 나직하게 남궁도위를 찾았다.

 

“도위.”

“네, 도장. 무슨 일이십니까?”

“나들이 가. 같이. 나중에.”

 

 유이설이 내뱉은 말에 남궁도위는 잠시 멈추었다. 아무래도 저번에 아이의 모습이 걸렸던 모양이었다. 남궁도위가 말이 앖자 유이설은 조금 말을 덧대었다. 사숙조, 태상 장문인도 같이. 알려줘, 나들이를. 그 말을 들은 순간 남궁도위는 이해하길 거부했던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검만 휘두르던 검귀 같은 사람이 스스로 의문을 가지고 인간성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남궁도위는 그 사실이 기뻤다.

 

“네. 이 전쟁이 끝나면 그 때, 저희 가을 나들이를 가는 게 좋겠습니다.”

“도위. 기뻐 보여.”

 

 그런가요? 하하. 이설 도장과 함께 나들이를 갈 기회를 얻어 기쁜가 봅니다. 남궁도위는 웃었다. 그 웃음이 절망이 되는 것은 약속이 오래된 이후였다.

 

7

 남궁도위는 기억했다, 유이설이 새카만 마공에 타 잿더미가 되던 그 날을. 마화가 진행되던 중에 천마의 목을 벨 결사대에 끼었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당시의 남궁도위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 했다. 빫은 시간이었으나 유이설과 그가 쌓은 유대는 유이설의 삶을 뒤덮고 남궁도위가 잃었던 것들을 잊게 했으며 그에 더불어 그가 바라보는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까지 하였으므로. 하지만 그가 부정한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마치 그의 아버지가 죽은 것처럼... 결국 남궁도위는 정마대전 종결 육 개월만에 유이설의 죽음을 인정했다. 유이설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

 

 남궁도위는 허릿춤에서 매화검을 꺼내들어 둥근 고분 위 못나게 난 풀들을 정리했다. 제가 매화검을 들고 풀을 정리했다는 것을 알면 청명은 화를 낼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무덤의 주인을 몰랐을 때나 하는 소리일 터다. 유이설의 죽음은 귀한 한철로 만들어진 매화검으로 풀을 정리해도 될만큼 가치가 있는 무덤이었다.

 

— 검, 그거 네가 관리 해.

— 네가 사고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난 몰라. 하지만 네가 사고에게 연모를 가지고 있는 건 알아.

— 그러니까 우리 사고를 추대해. 네 가주라는 직위로. 사고를 남궁의 큰어른으로 모시던지, 네가 사별한 부인이라고 하던지. 어떻게든 사고를 추양해.

— 사고를 남궁의 전설로 만들어. 그게 내가 사고의 유품을 넘기는 조건이야.

 

 퉁명스럽던 목소리가 떨리던 것을 떠올린 남궁도위가 픽 웃었다. 청명은 지금까지 단 하나도 변한 적이 없었다. 유이설의 죽음 앞에서도 청명은 천마에 대한 증오를 불태웠을 뿐 울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도위는 그것이 진심이 아님을 알고 있다. 청명은 그저 울지 못했을 뿐이다. 우는 방법을 몰라서 울지 못했을 뿐, 청명은 울고 있었다. 이것은 자신이 아버지를 잃으며 알게 된 고통이었다.

“—오는 길에 실력이 좋은 화백을 만나 당신을 그렸어요. 어젯밤에 내 꿈에 당신이 나와준 덕분이에요. 이걸로 남궁 사람들은 당신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거에요. 아, 화산의 것도 함께 그려달라고 할 걸 그랬나. 돌아가는 길에 찾아가 봐야겠어요.

“남궁은 여전히 활기차요. 하지만 여전히 도장에 대해서는 엄격해지더군요. 하기사, 그 빙검매화기 현 남궁 가주의 죽은 부인인데, 그러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싶지만은.”

“화산도 마찬가지지만, 화산은 늘 제사를 지낼 때마다 울기에 바빠요. 특히나 소소 누님은 이설 도장이 생각이 난다며 매번 취한 채로 연무장에서 매화를 피우더군요. 어쩌면 그들의 상처는 쉽게 낫지 않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그건 저도 마찬가지가 될 겁니다. 이설 도장, 아니, 부인.”

 

 남궁도위가 고개를 묻었다. 나는 가끔 당신을 모르겠어요, 부인. 당신이 어떤 이유로 무엇을 좋아했고 어떤 이유로 매화를 피우려 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화산에 남았는지...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당신이 왜 나를 대신해서 천마의 마공을 맞았는지에요. 몸도 성치 않았던 사람이, 멀쩡한 나와 내 검을 두고 뭣하러. 당신이 보고 싶어요. 제발 이 수수께기를 풀어서 나한테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남궁도위가 흘러내린 눈물을 훔친 순간, 그의 귓가에 바람이 맴돌았다. 바람이 말했다. 정말로? 정말로 그녀의 의중을 알고 싶어? 바람의 물음에 남궁도위가 고개를 저었다. 거봐, 넌 그녀를 이해하길 거부하고 있잖아. 넌 이미 모든 답을 알고 있어. 하지만 그녀를 잊기 두려워 모르는 척 하고 있는 거잖아. 그렇잖아. 아, 정말. 기분대로 되지 않는 날들이었다.

 

 그래, 남궁도위는 지금까지 유이설을 이해하길 거부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어떤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그녀에게 어떤 감정을 품게 되었는지. 그 감정이 무엇이며 그녀의 행동을 정의할 이유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궁도위는 그걸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를 생각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더 오랫동안 생각해야 한다. 남궁도위는 생각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빨리 까먹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해서 남궁도위는 그녀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그녀를 이해하지 않으려 했다. 결과적으로 남궁도위는 멍청한 새끼다. 그래, 그는 이해를 거부하는 멍청한 새끼였을 뿐이었다. 사랑을 위해 사랑을 외면하는, 그런... 그런 놈이었다, 남궁도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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