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하외다.
그날 성하(星河) 내리는 하늘 아래에서 나는 오직 당신을 향해 칠(七)개의 소원을 빌었소.
내가 빈 일곱 가지의 소원은 저 하늘의 신도, 물의 신도 듣지 못한 것이오.
내가 소원한 것 오직 당신을 향한 것뿐이라 내 굳이 저 먼 신들에게 빌지 아니하였소.
내가 소원한 것 오직 당신이 이뤄줄 수 있는 것이니 부디 마음 다해 들어주시오.
그 하해와 같은 마음에 내 소원 부디 품어 들어주시오.
그리하면 내 남은 원 더는 없을 것이니. 그저 그리 해 주시길 간청드리오.
내 일곱 가지 소원 추신하여 두겠소. 부디 읽어 주시오.
나의 연정이여.

소망(所望)
구화산 제자검존 x 스승이설
하나. 당신께서 그 마음 한켠 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여 주시길 바라오.
선선한 공기가 부드러이 뺨을 스친다. 바람에 찬기가 섞이기 시작했구나. 붉게 물들기 시작한 높은 가을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던 여인이 무심한 낯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사부, 진짜 같이 안 가주실 거예요?”
“수련. 못 끝냈잖아.”
어느새 지척에 다가온 제자가, 그녀의 손에 들린 날붙이를 휙 빼앗아 들고 있었다. 수려한 얼굴을 있는 대로 구긴 것이 제법 볼만하구나. 이목구비 하나하나에 그득그득 불만이 들어차 있었다.
“사부. 저 오늘 축시부터 일어나 있었어요, 아시잖아요. 사부 일어나시기 한참 전부터 나와서 수련하고 있었던 거. 웬일이냐고 눈 동그랗게 뜨실 때는 언제고... 저 진짜 괜찮다니까요??”
“너 말고. 나.”
“아! 사부 진짜 이러시기에요?”
단말마를 내지른 남자가 아랫입술을 꾸욱 짓쳐 물고 울망한 눈동자를 들어 원망스런 눈빛을 보내왔다. 하는 짓이 꼭 떼를 쓰는 아이 같기도 하고, 간식 시간을 빼앗긴 강아지 같기도 하고.
아니지. 그런…어울리지도 않는 귀여운 것들에 저 대문짝만한 제자를 비하는 것도 실례렸다.
그보다는, 그래. 정인에게 청을 거절당한 어린 낭군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사형제들이 들었다면 그 역시도 퍽 어울리는 비유는 아니라 학을 뗄 것이 분명했지만, 아무렴.
“술 마실 거잖아. 그래서 별로.”
“아니… 그치만 사부, 축제잖아요. 축제라 하면 객잔에서 좋은 술 한잔 걸치고, 네? 고기도 좀 뜯고...! 아, 잠만. 사부, 가지 마세요. 아 안 마시면 되잖아요 안 마시면!!”
“네가? 술을?”
“..같이 가 주시면 안 마실게요. 아니 사부 평소에 술 그렇게 싫어하시는 것도 아니면서 왜 저랑 다닐 때는-.”
“주정. 받아줄 생각 없어.”
“...진짜 안 마실게요. 제가 뭐... 뭘 걸지? 검이라도 걸까요? 그치만 사부, 오늘이 지나면 삼 년은 기다려야 하잖아요. 저 사부랑 같이 가고 싶어서 이틀 내내 피눈물을 흘리는 마음으로 화음에는 발길도 안 들여놓고 있었는데… 사형들이 네가 웬일이냐며 놀란 토끼 눈을 하고 놀리고 가는 것도 한 대씩 치고 싶었지만, 꾹 참았는데...”
“잠깐, 뭘 걸어?”
“...”
“뭘?”
“실언했습니다.”
꿀꺽, 숨을 삼킨 청명의 애타는 시선이 저를 앞지른 스승의 작은 등에 가 닿았다. 정말 안 가주시는 건가? 갈급한 마음에 입이 바짝바짝 말라 들어갔다.
마지막 날인데. 오늘을 놓치면 언제 또 함께 갈 수 있을지 모르는데. 삼 년만의 축제를 맞은 도시가 단비를 맞은 들판처럼 맥을 뛰며 생동하고 있을 것인데. 연모하는 이와 가을 축제 한번 함께 구경하고 싶다는 것이 그리 큰 욕심이 되던가. 물론 그의 연정이 닿은 이가 하나뿐인 제 스승이라는, 지극히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긴 했지만. 내가 뭐 정인으로 함께 해달라 한 것도 아니고.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인가.
서러운 마음이 물을 먹은 듯 자꾸만 불어났다. 발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정말 안 가주실 겁니까? 제자가 이리 간절하게 부탁하는데도요.”
청명의 걸음은 결국 청매관을 오르는 계단을 채 한 칸도 오르지 못하고 멈추어졌다. 고요한 사위에 섞여든 목소리가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노을로 붉어진 시야에, 희고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황혼의 빛 자락을 담은 검은 머리칼이 물비늘처럼 부드러이 반짝이고 있었다.
청명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나는 지금 아주 애간장이 다 녹아들어 죽겠는데, 사부는 저렇게나 평온하시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 와중에 황혼의 빛 자락이 내려앉은 저 얼굴이…단호하고 무감한 시선이... 아득하리만치 아름다워서... 청명은 불현듯, 이 억울하고 아쉬운 마음마저 삼켜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뭐 정 안 가시겠다 하시면, 그냥 곁에 딱 붙어서 밤새 투정이나 부려 보지 뭐. 저 얼굴 가만히 구경이나 하면서...
“약속. 지켜.”
“...예?”
파뜩 떨어져 나가던 정신머리를 간신히 붙잡은 청명의 매화 색 눈이 화등잔만치 크게 뜨였다. 의아한 시선이 여인의 달싹이는 입술에 가 닿았다. 황혼의 빛을 머금은 눈동자는 여전히도 무감했다.
“마시면 안 돼. 술.”
“어…네? 네, 당연히...”
“그리고, 옷 갈아입어.”
“옷... 옷이요? 갑자기?”
“도복. 눈에 띄잖아. 너는 검존이니까, 특히 더.”
“엇... 어… 그니까...”
“챙겨. 일각 뒤에 산문에서 봐.”
“같이 가주시는 거예요?”
“응. 빨리 가.”
시시각각 밝아지는 수려한 낯을 가만히 바라보고 선 유이설은, 제자의 저 너른 어깨 뒤로 붕붕 흔들리는 꼬리가 보이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저리 좋을까. 그 맑은 웃음을 바라보고 있자니, 제 가슴 한켠에 작게 핀 꽃망울 같은 것이 토독, 번져 나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라는 것을 얻어낸 아이 같기도 하고, 주인의 품에 안긴 강아지 같기도. 그보다는, 그래. 꼭 정인의 산보 길에 동행을 허락받은 낭군 같지 않은가?
한층 밝아진 표정으로 튀어 나간 제자의 너른 어깨가 아까와는 달리 잔뜩 솟아올라 있는 것이 제법 귀여운 것도 같고. 산등성이 타넘어 지는 태양의 빛이 그저 붉었다. 홍색 하늘을 올려다보는 흰 낯 위에 미미한 웃음이 번졌다.
둘.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 무엇이든 내가 알게 해 주시오.
쏟아지는 성하(星河) 아래 놓인 축제의 마지막 밤, 거리에서 쏟아진 은은한 불빛들이 하나둘 모여 들불처럼 밝게 번져 나갔다. 삼 년 만에 축제를 맞이한 도시, 화음현이, 가을비를 머금은 금빛 들판처럼, 생기를 가득 품어 맥동하고 있었다.
설레이는 소음으로 가득 찬 인산인해의 거리 그 한 켠, 색색의 당과를 늘어놓은 노점 앞에, 흰 장포 차림의 거대한 남자가 우뚝 멈추어 서 있었다.
대충 높이 끌어 올려 묶어 이리저리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 아래로 드러난 눈썹이 굵고 짙었다. 맹수의 그것만치 날카로운 눈매와 곧게 뻗어 내려온 코. 꾹 다물린 입술. 단단한 턱선까지. 분명 의복은 평범한 양민의 것인데, 그 풍채와 기운이 도저히 예사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불안한 시선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매대에 놓인 당과들을 노려보는 남자에게 날아와 꽂혔다. 정작 온 사방의 시선을 받은 남자는 아무렴 무엇도 상관없다는 듯, 그저 인상을 매섭게 구기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 앞에서 바짝 굳어 남자의 눈치를 살피는 점주 구회의 얼굴만이 차차 희게 질려 가고 있을 뿐이었다. 무엇이 문제이지. 뭐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거지. 급기야 눈을 꾹 감아버린 구회를 바라보는 주변 상인들의 안타까움에 고개를 모로 젓는 순간이었다.
“못 골랐어?”
“아, 사부.”
야차같이 얼굴을 구기던 남자의 곁에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선 고운 목소리의 주인을 향해 휙 시선을 던진 상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급히 숨을 집어삼켰다.
상인이라 함은, 하고 많은 장사를 거듭하며 중원 이곳저곳을 온통 돌아다녀 본 이들이 아니던가. 이 곳에 모인 상인들은 다들 이 바닥에서 한가닥 날고 기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자신하지 않는 이들이 없을 터였는데. 그들 그 누구도 저만한 미모의 여인을 본 경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모로 기울어지는 하얀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니, 요괴에 홀린 듯 정신이 몽롱하게 흐려지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숨이 막혔다. 감히 어떤 꽃도 저 여인의 앞에서 고개를 들 수는 없으리라.
온 거리의 이목을 독점하였으면서도 주위의 동요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은 무심한 낯의 여인이, 범 같은 남자를 향해 가만 고개를 기울였다. 남자는 조금 전까지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기고 있던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치 맑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어, 아주 웃기까지 한다. 뭐가 그리 좋은지 남자의 입꼬리가 비죽비죽 자꾸만 솟아오르고 있었다.
“사부가 뭘 좋아하실지 모르겠어서. 생각해보니 당과가 있으면 맨날 저만 먹었던 것 같더라고요. 사부 드시는 걸 본 적이 없는데... 그러니 뭐가 좋고 뭐가 싫으신지 알 수가 있어야죠. 저 겨우 당과 때문에 미움받고 싶진 않거든요”
“안 미워해.”
“...알아요 사부. 그냥 하는 말이에요.”
“그리고, 안 먹긴 했지.”
“네. 당과 올라온다 하면 다 제 쪽으로 밀어두시고. 아 혹시 단맛이 싫으신 건...”
“네가 좋아하니까.”
“...어?”
“왜?”
남자의 표정이 멍하니 풀어졌다. 씰룩이는 입술이 가파른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그런... 그런 거였어요? 저 좋으라고 일부러 하는 소리 아니시고?”
“뭐 하러 굳이.”
“일부러 이러시는 거 맞네.”
“...”
마음대로 생각하렴…덧붙이는 목소리가 심드렁하니 높낮이가 없었다. 좋아 죽겠다는 양 크게 웃음을 터트린 청명이 큰 손으로 얼굴을 텁, 덮어 쓸어내렸다. 하여간, 귀여우시긴.
“아, 흐으... 사부도 진짜... 그래서 당과는 좋아하시는 거예요? 저 때문에 못 드시고 계셨던 거고?”
“싫어하진 않아. 너 때문은 아니고.”
“맞는 것 같은데. 안 되겠다, 이 기회에 다 드셔보세요. 마음에 드는 거 있으시면 말씀하시고. 앞으로는 그건 절대 손 안 댈 테니까,”
“..괜찮아.”
“제가 안 괜찮아요. 저기, 이거 하나씩 다 주세요.”
“..."
여전히도 무표정한 스승의 하얀 얼굴 위로 떨떠름한 기색이 떠올랐다. 이 미미한 변화를 알아챌 수 있는 것은 이 화음과 저 위의 화산을 통틀어 오직 저뿐일 테지만. 당연하지, 내가 사부 옆에 있던 세월이 얼만데… 청명의 눈꼬리가 나른하게 휘어졌다.
작은 당과 몇 개를 골라 가만 건네면, 제 스승은 그것을 차마 물리지 못하고 그 흰 손으로 그저 가만 들었다. 멍해진 눈동자가 힐끔힐끔 제 쪽으로 자꾸만 향하는 것이, 늘 그래 왔던 것처럼 제 손에 들린 단 과자를 제자의 입 속에 쏙 넣어 주고 싶은 모양새였다. 네가 좋아하는 것을 왜 내게 양보하느냐는 듯, 질책 섞인 눈동자를 청명은 부러 무시했다. 대신 저보다 한참 작은 어깨를 부드러이 감싸 쥐고, 가벼이 앞으로 떠밀었다.
마지못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여인이 느릿한 움직임으로 손에 든 것을 작게 베어무는 것을 확인한 청명이 그제야 작게 숨을 뱉어내었다. 하여간 좋아하시는 것 하나 알아내기 참 어려운 분이지. 그래서 질릴 새가 없긴 하다만…
“어때요? 먹을 만하세요?”
“응. 괜찮네.”
도란도란 오가는 대화가 다정했다. 우선은 이 정도로 만족해야지. 여전히 머리 위엔 성하가 쏟아지고 있었다. 아직은 밤이, 밤이 기니까.
보폭을 맞춘 두 사람분의 느긋한 걸음이, 생동하는 화음현의 거리로 이어졌다.
셋. 당신께서는 내게 받아 가신 것에 그 어떤 부채(負責)도 느끼지 말아주시오.
그것 그저 나의 욕심이오.
“사부. 이거 예쁘지 않아요? 희고 고운 게 딱 사부 같은데.”
“...”
사박사박 느릿하게 이어지던 걸음이 못 박힌 듯 자리에 멈추어졌다. 동그랗게 뜨인 청명의 매화 색 눈동자 안에, 흰 매화 모양 머리 장식의 단아한 자태가 아른아른 일렁였다. 그것은 눈꽃을 꼭꼭 뭉쳐 만든 것처럼 희고 고운 빛을 내고 있었다. 겨울의 찬기를 품에 안고도 흐드러지게 피어나 정결히 주위를 밝히는 봄꽃 같은 것. 제 곁에 선 하나뿐인 스승과 꼭 닮은 것. 물론 사부께선 이런 장식 같은 건 달지 않으셔도 고우시지만. 겨울 눈꽃 닮은 여인에게 눈꽃 닮은 봄꽃 한 조각, 달아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쩌겠는가. 겨울 눈꽃 닮은 여인의 봄꽃 같은 입술에서 톡 튀어나온 한마디는 남자의 그런 작은 바람마저 꾹꾹 집어 누르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안 어울려.”
“어떻게 안 어울려요? 흰 것이고, 매화잖아요. 완전 사부 건데. 그리고 사부는 흙을 뒤집어써도 고우세요.”
“...말은 잘하지.”
“진짜로요. 아니 사부 지금껏 돌아다니면서 다 저 줄 것만 사셨잖아요. 제자 받아먹기만 하려니 마음이 영 불편합니다. 어떻게 작은 것이라도 하나 더 스승님 품에 안겨드리고 싶은 마음 이미 다 아시잖아요.”
“그야 나는 갖고 싶은 게 없으니까.”
“어휴 진짜.”
청명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냈다. 하여간 뭐 하나 쉬운 게 없으신 분이지. 제 사부가 저리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는 기색을 보일 때마다 속이 쓰렸다. 그저 매화, 매화만 바라보고 살아온 제 스승은 도통 속세의 것들을 바라는 일이 없었다. 아, 소면은 제외지만.
청명이 그녀와 사제의 연을 맺은 시간이 그리 짧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의 사부는 제자에게도 매화와 검, 그 이상을 바라는 일이 도통 없었다. 그녀의 시간도, 시선도, 매화도, 검도, 마음도 온통 바라고 마는 그와는 달리.
맞닿지 못하여도 괜찮다, 그저 이 마음 온전히 내보일 수만 있어도 족하다. 그리 다짐했건만, 불쑥불쑥 이런 차이가 서러움이 되어 그의 마음속을 가득 채우고 나갈 때마다, 저도 몰래 묘한 역심이 끓어오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뻗어진 청명의 손이 흰 꽃장식을 덥석 잡아 들었다. 놀라 제 장포를 덥석 쥐어 잡는 손길을 가볍게 무시하고 값을 치른 청명이 휙 몸을 돌렸다. 장포를 쥔 흰 손을 잡아 떼네고,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뒤집고, 그 위에 온기 남은 장식을 올렸다. 진하고 수려한 낯 위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번졌다. 아주 놀란 토끼가 되셨네. 여상스럽기 그지없는 무표정한 낯 위에 떠 오른 동요가 기꺼웠다. 이런 표정은 또 내 앞에서만 보이시지. 내 앞에서만.
“...안 어울린다니까.”
작게 한숨을 내뱉은 붉은 입술이 달싹였다. 아주 싫은 기색은 아니신 걸 보니, 그저 조금 어색하실 뿐이구나. 넘실넘실 차오르던 긴장을 삼킨 청명은 그제야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방금 그거, 고맙다고 하신 거죠?”
“아니. 그건 이제 해야지. 고마워.”
“네에. 얼른 달아보세요. 잘 어울릴 거예요. 제자 이런 일로 감히 거짓을 고하지는 않는 거 아시잖아요.”
“...”
“사부?”
꾹 입을 다물고 선 여인의 투명하고 깊은 검은 눈동자가 도르륵 옆으로 굴러 내려갔다. 곤란한 기색이 역력한 움직임이었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반응에 청명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 들다가,
“달아 본 적이 없어서.”
이내 크게 뜨였다.
“네가 달아줘.”
작은 음성과 함께 제 손에 장식을 돌려놓고 어느샌가 가만 뒤를 돌아선 스승의 작은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던 청명의 툭 벌어진 입가에서 저도 모르게 낮은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내가? 사부에게? 저 작은 머리 위에, 이걸? 이... 투박한 손으로…?
“사… 사부. 제가 이걸 어떻게…”
“어울릴 것 같다며. 달아줘.”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체념한 듯, 말없이 검은 머릿결을 모아 쥐는 손길이 그저 더없이 어색했다. 평생을 화산에 몸담아 살아오며 줄기차게 검과 술병만을 쥐어 왔던 손이, 여인의 머리칼을 언제 또 만져 보았겠는가. 굳은살 박인 상흔 가득한 손끝이, 가늘게 떨려오고 있었다.
아, 사부는 왜 머릿결도 이리 부드러우셔서. 사람 떨리게…. 깨질 것을 다루는 듯 조심스럽고 느릿한 손길로 긴 머릿결을 반쯤 돌돌 말아 올려 모아 잡은 청명이 흰 매화 장식을 더듬더듬 꽂아 넣었다. 느슨하게 풀어진 머리 중간에 장식이 얼기설기 간신히 붙어 달렸다. 어설픈 모양새인데도, 눈이 멀 것만도 같이 아름다웠다. 늘어져 있는 것이 무슨 대수랴, 하얀 매화를 단 제 사부께서 저리 아름다우신데. 청명은 그저 멍하니 굳어 있었다. 매화 색 눈에 흰 매화를 단 여인을 눈에 담으며…점포의 주인이 어느샌가 그들의 곁에 다가온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다.
"아유, 낭군께서 아주 넋이 나가셨네. 이렇게 대충 묶어 두시고는! 비켜봐요, 제대로 달아 드릴 테니.“
반쯤 정신을 빼놓고 있었던 주제에 다정한 낯의 아낙네가 서글서글 웃으며 뱉은 말을 듣기는 한 것인지, 완전히 넋이 나가버린 제자를 곁눈질로 살핀 유이설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낭군은 아니에요. 제자.”
“사제지간? 이상하다... 아주 홀딱 빠진 기색이시길래, 정인이겠거니 싶었는데.”
얼기설기 늘어진 머리칼을 풀어내고 다시 모양새를 다듬어 묶어내는 손길이 익숙하고 따스했다. 유이설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인이라. 제자가 저리 멍하니 굳어 있지만 않았다면 얼굴이 온통 붉어져서는 있는 대로 말을 더듬어 댔을 것이다. 기쁜 기색을 전혀 숨기지 못한 채, 사부께서 불편해하시니 그런 말씀은 삼가 달라 입을 움직여 댔겠지.
그래, 그럴 것이다. 정인이라는 다디단 단어를 제 품에 꼭꼭 품어 숨겨놓고는, 쾅 문을 닫아버렸을 것이다. 당신을 연모한다, 온몸으로 말해오면서도 정인이 되어달라는 말 만큼은 용케도 뱉은 적 없는 아이니까. 시도 때도 없이 넘실대는 감정은 한순간도 숨기지 않았으면서, 속에 품은 가장 큰 바람은 꾸준히도 숨기어 온 아이였다. 어리숙한 제자는 유독 그런 데에서 미련한 면을 보였다.
“자, 다 되었어요. 제가 꽤 심혈을 기울인 작품인데, 이게 이리 고운 분께 가게 되다니. 오늘은 저도 운때가 맞는 모양입니다.”
“...감사해요.”
감사의 표시로 가벼이 숙여지던 유이설의 고개가 멈칫, 돌아갔다. 진열대 저 구석 한켠으로 손을 뻗은 유이설이 끈 같은 것을 조심스레 집어 올렸다. 흰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 가던 점주의 낯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낭군이라…낭군… 사술에라도 걸린 듯 한 단어만을 뇌리에서 읊조리던 청명의 멍한 시야에 대뜸 하얀 손이 훅 들이찼다. 움찔 몸을 움츠린 청명의 매화 색 눈동자가 휘둥그레 크기를 키웠다.
“아 깜짝…어, 사부?”
“받아.”
어리둥절한 눈으로 흰 손과 무감한 검은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던 청명은, 이내 저 손에 담긴 검은 천 조각 같은 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삽시간에 웃음이 번져 나갔다. 언제 혼을 다 빼고 넋을 놓았냐는 듯, 몽글몽글 애정이 들이차기 시작한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더없이 소중한 것을 다루는 듯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손길이 천 자락을 받아 들었다.
얇고 긴 천은 앞에 선 여인의 머리색만큼이나 검디검었다. 높게 묶인 청명의 머리에 달린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그저 천 조각에 불과하거늘, 그의 눈엔 그 자태가 기이하게도 지독히 아름다워 보였다. 별이 뜨지 않은 밤하늘만치 어두운 그것의 중간 즈음에, 두어갈래의 검은 끈이 덧대어 꿰매져 있다. 그 끝에 띄엄띄엄 매달린 작고 붉은 석류석 서너개가 거리를 수놓은 등불 빛을 반사해 은은한 빛을 내고 있었다.
매화구나. 매화를 받았으니, 매화를 건넨다. 매화로 이어진 연이니까. 그런 것일까. 하여간 그냥 받는 법을 모르시지, 내 사부께선. 비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부.”
“응.”
“직접 묶어 달라 해도 안 해주실 거죠?”
“잘 아네.”
“당연하죠. 제가 사부 제자로 살아온 세월이 얼만데…아, 사부 잠시만. 같이 가요!”
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천 조각을 대충 풀어 장포에 쑤셔 넣은 청명이 급히 걸음을 옮겼다. 타박타박, 큰 보폭에 멀어졌던 작은 등이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늘어진 머리칼을 틀어 올려 다시 질끈 고정한 청명이 살짝 고개를 숙여 어깨 위로 늘어지는 붉은 조각들을 눈에 담았다. 내 마음 같구나. 붉디붉은 것이.
청명이 곁에 선 이를 향해 힐끔 시선을 내리는가 싶더니, 모른 척 슬쩍 어깨를 붙여 걸었다. 가까워. 불편해. 타박하시면서도 거리를 벌리시진 않는다. 자연스레 곁을 내어주시는 것이 참을 수 없이 기꺼워, 청명은 그저 나직이 웃었다. 나직이.
넷.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는 것, 당신도 아쉽다 여겨 주시오.
휘영청 높이 뜬 보름달이 가만 세상을 비추었다. 은은한 달빛을 온몸으로 받아낸 물길이 흐르는 결을 따라 부드러이 반짝였다. 물길을 거슬러 걷는 수많은 연인의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흘러넘치는 애정이 다정히 뜨인 눈동자를 촉촉이 적신다. 손에는 정인의 옷자락을, 품에는 작은 등불을 안고 걷는 이들이 하나둘 물길 옆에 멈추어 선다. 어떤 이들은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내려 물 위로 띄운다. 어떤 이들은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들어 하늘로 날아 올렸다. 소담스레 모인 불빛들이 달빛을 벗 삼아 넘실거리며 춤을 춘다. 불빛을 눈에 담던 이들이 하나둘 눈을 감았다. 그리고 가만, 양손을 모아 잡고 빌었다. 간절히 바라는 것들을. 너울지는 불빛의 파도에 그 간절한 소원이 실리기를. 조류에 몸을 맡긴 소원들의 흐름이, 그 끝에 저를 지키고자 하는 존재에 가 닿기를. 그들이 그 간절함을 안쓰러이 여겨, 작은 숨결 한 조각을 불어넣어 주기를.
“달이 기우는구나.”
읊조리는 여인의 뒤로 넘실넘실 불빛들의 파도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야지. 덧붙여지는 문장이 더없이 간결했다. 고저 없는 음성에 미미하게 묻어난 감정 조각을 읽어낸 청명이 피식 입 새로 웃음을 흘렸다. 아쉬우신가. 굳이 떠보지 않으셔도 되는데. 나는 이 천금 같은 시간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
가을밤의 서늘한 공기가 폐부를 스쳤다. 청명은 대답 대신, 벗어낸 흰 장포를 여인의 어깨 위로 조심스레 덮어 올렸다.
“이게 대답이야?”
“날이 찹니다.”
“...별로.”
“에헤이…걸치고 계세요. 돌려주셔도 안 입을 거예요. 돌아가기 싫어 건네는 뇌물이라 생각하세요.”
여인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재차 반박할 생각은 없는 듯, 흰 손끝이 살짝 흘러내린 장포를 잡아 제 자리로 끌어 올렸다. 일련의 움직임을 고요히 감상하던 청명의 입 새가 다시 벌어졌다. 낮은 목소리가 답지 않게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소원.”
“응?”
“빌고 싶으세요?”
긴 속눈썹 아래 그늘진 검은 눈동자가 두어번 자취를 감추었다가, 모습을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고심하듯 깊게 잠든 투명한 눈동자가 너울지는 불빛의 강을 담는다.
“아니, 괜찮아.”
고저 없이 담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평온하고 고운 목소리. 차르르 물길 소리. 고요한 사위에 들리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뿐이었다. 두 울림이 어우러지는 소리는 퍽 아름다웠고, 청명은 그 아름다움에 반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오늘은 이미 충분히 떼를 썼지 않은가. 이보다 더 바라는 것은 욕심이지. 청명은 그저 입을 다물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잔잔한 가을의 밤. 이대로 쭉, 선선하기 그지없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저 고운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어도 좋을 것 같았기에.
“...사부?”
뻗어 나온 흰 손이 청명의 장포 자락을 스쳤다. 옷자락을 타고 내려간 흰 손이 청명의 단단한 손끝을 잡고, 미약하게 당겼다. 맞닿은 살결이 서늘했다. 스승의 시선은 제자를 향하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에는 여전히도 하늘로 날아오르는 주홍색 빛무리들이 담겨 있었다. 의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제자가 한발짝, 다가서는 것을 확인한 유이설이 느릿하게 걸음을 떼었다.
다섯. 당신께서 그저 나를 바라시기를.
사락사락,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이들이 수없이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저 먼 어디에선가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들려 오는 것만도 같았다. 설레이는 마음들이 모여 공기를 데운다. 은은한 불빛들이 반딧불이처럼 물가를 메우고 반짝인다. 실로 감상에 젖을 만한 광경이었다. 허나 그 광경이 아무리 아름답고 감성적이로서니, 이 여인만 할까. 청명은 물소리가 사위를 채운 다리 위에서, 멈추어지는 스승의 걸음 자락을 보았다. 서늘한 온기가 손끝을 떠나간다. 그것이 퍽 아쉬웠다.
물길 위에 놓인 다리. 그 가에 붙어 한발짝, 걸음을 내디딘 유이설이 슬 고개를 숙여 발치에서 일렁이는 윤슬을 바라보았다. 청명은 그 나긋한 시선을 따라 작게 고개를 숙였다. 낮은 다리 아래로 빛을 머금은 물이 일렁인다. 작은 등들이 그 위를 덮고 내려와 발아래 놓인 돌 조각 아래로 자취를 감추고 사라진다. 저 소망들은 어디로 흘러 사라지고 있는가.
“등은 날리지 않으시겠다더니.”
“안 날려.”
부드러이 일렁이는 빛무리의 움직임은 꼭 노을 진 바다의 파도와 같아서, 사람의 마음 한 켠을 가만 어루만지는 힘이 있었다. 늘 차분히 가라앉아만 있는 유이설의 마음이, 드물게도 감성에 젖어 들고 있었다. 따스했다. 빛도, 제 어깨 위를 덮은 장포 자락의 온기도. 흔들림 없는 청명의 시선도.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를 돌아보면, 그 역시 저를 돌아본다. 매화 색 눈동자 안에 주홍색 빛무리가 넘실거린다. 그녀는 그 다정하고 붉은 시선 안을 떠돌고 있는 온갖 감정들의 목적지가 제 마음속임을 모르지 않았다. 스승을 향한 공경이라는 얕은 물안개로 둘러싸인 연못의 표면으로 어찌할 줄 모르는 연심이 속절없이 떠오르고 있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 그녀의 제자는 도통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이였으니까.
사모한다는 말을 들었었던가. 연모한다는 말이었던가. 툭 내뱉은 연심이었던가. 온 마음을 다한 경애였던가. 유이설은 제자에게서 간혹 쏟아져 내리곤 하는 감정의 명확한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경애이기도, 공경이기도, 연심이기도 하였기에.
언제나, 그는 제 마음을 구태여 숨기지 않았다. 그날부터 그랬다. 대뜸 제자로 받아 달라 찾아와 상기된 낯으로 열변을 토하던 그날부터. 그저 제 속을 온통 내보여 놓고는, 그것을 알아주시는 것으로도 족하다는 듯 굴었다.
나는 그것이 내심 기꺼웠던가. 매화, 오직 매화만을 좇아 살아와 곁의 온기를 어색히 여기는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그것을 애정하기에 괜찮다는 듯... 그저 바라보아 주고 있는 시선이. 그저 소담스레 피어난 애정이 주위를 물들여 주는 것이. 한발짝 떨어진 곳에 못 박힌 듯 멈추어 서서, 언젠가 그녀가 그 한발짝 좁혀 다가와 주기를 기다리며 기꺼이 인내해 주고 있는 것이.
그래, 그저, 겨울을 인내하는 매화나무처럼. 그것이 못내 늘 가슴 한켠을 간질였다. 늘 한걸음 뒤에, 그녀의 매화가 있었다.
“소원을 빌 필요가 없으니까.”
“...”
“네가 내 소원이라.”
그래, 그랬다. 매화를 좇던 내 삶에 찾아온 네가 그저 매화였기에. 그 매화가 떠나지 않고 곁을 채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언젠가 제가 다가가 그 품에 가만 고개를 기대어 주길 기다리며. 그저 그랬기에.
“내 소원은 언제나 매화였어. 언제나.”
“...”
“그러니 빌 이유가 없지.”
“...”
그래 네가... 네가.
“네가 내 매화니까.”
여섯. 아, 그보다는. 당신께서 나의 가장 간절한 소망, 한 번만 눈여겨 보아주었으면 하오.
그 목소리는 가을밤의 연풍 같기도, 청련히 흐르는 물결 같기도 했다. 아니, 그보다는. 달빛이 목소리가 된다면, 이런 음을 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분명 이리 곱고, 이리 고요할 것이다.
내 매화. 그가 제 사람임을 확신하는 그 목소리가 지독히도 달콤했다. 청명은 차마 웃음 짓지 못했다. 입꼬리를 말아 올리면, 그대로 꾹꾹 줄곧 짓눌러 오던 욕심이 툭 튀어나와 버릴 것만 같아서.
떨리는 손끝이 여인의 어깨 위를 배회했다. 이대로 잡아 제 품으로 끌어안으면 좋으련만. 성급한 짓이겠지. 이제 겨우 그 속마음의 조각 한 개를 받아본 주제에. 꾹 쥐어진 손안으로 무섭게 파도치는 감정이 삼켜 들어갔다.
청명은 제 스승을 품에 안는 대신, 조심스레 흰 뺨 위에 손끝을 올려 보았다. 하얗고, 보드랍다. 그 어떤 여린 꽃잎도 이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심장 안쪽 저 깊은 곳에서부터 꽃이 피어오르는 듯, 마음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흉터 가득한 제 거친 손에 혹시나 이 보드라운 뺨이 긁힐세라, 채 살결을 쥐어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검은 눈동자가 긴 속눈썹 아래로 느릿하게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다. 미동 없는 낯 위에 가만 미소가 떠올랐다. 저 하늘에 휘영청 뜬 달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희고 고운 낯이었다. 그 사랑스러운 모양새에 결국 청명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는 치미는 연정 앞에, 이 사랑스러운 낯 앞에 거짓을 고하는 법 따위는 알지 못했다.
“소원이 없다 하셨죠. 제가, 사부의 매화니까.”
“응.”
“하지만 사부, 저는 소원이 있어요. ”
“...”
왜 고하지 않았느냐고. 제게 소원이 없어도 네가 바란다면 등 정도야 띄워 주었을 텐데. 그리 책망하는 듯한 검은 시선이 가늘어졌다. 청명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삼키었다. 저 책망 어린 시선마저 온전히 내게 향한 것이 기쁘다 하면, 질색하시겠지.
“그리 보지 마세요. 애초에 저는, 저런 작은 등에 대고 소원을 빌 생각은 없으니까. 소원을 하늘에 날리면 뭐 해요. 원시천존께서 그걸 모두 건져 보시지는 못할 것 아니에요. 저렇게 많은데. 신이 아무리 할 일이 없다 한들 좀 힘들겠죠.”
“...”
“뭐... 바라는 것을 저리 빌어 떠내려 보내고, 누군가가 그를 이뤄 주길 바라는 게 영 제 성격에는 안 맞기도 하고. ”
“응, 그렇지.”
“...사부. 저는,”
청명의 매화 색 눈동자에 흰 낯의 여인이 온전히 담겼다. 소망의 불빛을 온몸으로 받고 선 검수는 지독히도 아름답고, 고요했다. 검 하나로 천하를 딛고 선 남자는 그 고요의 초상을 언제나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부서질까 잃을까 그저 마음속으로 바라기만 하였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어떤 신앙에도 의지하지 않고 제 손으로 이루어 내고 싶어요.”
“...”
그래, 그저 바라기만 하였다. 욕심을 드러내면 더 이상 곁을 내어주지 않을까 봐. 그것이 두려워서.
“한없이 오랜 시간을 쏟아 낸다 해도. 제가 원하는 결말을 맞지 못한다 해도.”
“...”
“저는 노력할 거예요.”
애정 어린 낯이었다. 유이설은 이 낯을 알고 있다 생각했다. 허나 그것은 그녀가 모르는 것이었다.
하릴없이 내보여지는 감정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치 무거워져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경애이기도, 공경이기도, 연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저 바라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먼 길을 돌아 작게 드러난 진심을, 얇은 무언가가 여전히도 가리고 있었다. 유이설은 그 마음의 깊이를 재어 볼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가리고 있는 것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저것은 두려움이고, 망설임이다. 검을 휘두를 때에는 제 몸이 다치건 말건 일절 망설임이 없으면서, 그의 것도 아닌 마음에 부담을 지울까 두려운 것일 테지. 유이설은 뺨에 닿은 온기를 인식한다. 여전히 제 뺨을 제대로 감싸 보지도 못하는, 조심스러운 손길을.
“사부.”
“응.”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가 계속…노력한다면. 이 소망, 언젠가 이루고자 한다면. 바라는 대로 욕심을 내어 본다면.”
“...”
“제가…제가 감히, 이룰 수 있을까요.”
“네 소원이 뭔 줄 알고.”
“...알고 계시잖아요. 이미 다 알고 계시면서. 제 속은 온통 다 들여다보고 계시면서.”
구태여 부정하지 않는다. 유이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떠올랐다. 실로 보기 드문 미소였으나, 오늘은 이런 작은 변화라도 자주 보여야 할 것만 같았다.
감성에 젖어서 그래. 저 등불들이 아름다워서. 유이설의 시선이 제자의 매화 색 눈동자를 지나 하늘로 향했다. 소망을 담은 불빛들이 별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 별 무리 사이에 떠나보낸 소망이 없음에도 조금 먹먹한 기분이 드는 빛이었다.
나의 소원도, 너의 소원도 여기에 있구나. 네 앞에, 그리고 내 앞에. 바람과 물결에 띄워진 수많은 소망 속에, 오직 너와 내 것만이 땅에 붙어 있다니. 기이하고, 기꺼웠다.
이루지 못할 것이 무엇 있으랴, 우리의 소망은 그저 우리의 손안에 머물러 있는데.
“글쎄. 언젠가는.”
“...”
허나 아직은, 매화가 필 계절이 오지 않았다. 아직은 제 마음에 겨울이 다 가시지 않았다. 그러니 그저 바랄 뿐이다.
네가 내게 유예를 주기를. 내가 시린 바람을 떨쳐 내고, 쌓인 눈밭을 헤치고, 매화나무를 품에 안을 용기를 얻을 때까지.
“언젠가 매화가 피면. 그리 될 거야.”
“...”
“너는 내 매화고.”
“...”
“매화(梅花)검존이니.”
일곱. 그리고 그 소망, 부디 한 번만 이루어 주시오.
청명이 잘게 몸을 떨었다. 매화, 매화. 읊조리는 단어가 그저 하염없이 달았다.
내뱉어진 소망에는 유예가 붙었다. 매화가 필 계절이 올 때까지. 아직은 그 마음이 겨울 자락을 다 벗어나지 못했으니, 그저 인내를 바란다. 스승이 바라는 것은 조금의 유예, 그뿐.
청명은 생각했다. 이 간절한 소망, 차마 사그라트릴 자신조차 없는 마음, 감추고 감추어도 종국엔 쏟아지고야 하는 이 바람,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깟 인내가 대수랴. 그 유예, 그것이 대수랴.
“사부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참으로 드문 미소가, 여전히 하얀 낯 위에 떠 올라 있었다.
아, 나는 치미는 연정 앞에, 이 사랑스러운 낯 앞에 거짓을 고하는 법 따위는 알지 못한다.
뺨 위를 맴돌던 손이 내려가 희고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뺨만치 부드러우나 자잘한 흉이 가득 자리 잡은 손이었다. 평생 날붙이를 쥐고 살아온 것이다. 그것이 저와 닮아 있었다.
청명은 조심스레 감싸 쥔 손을 끌어 올리고, 드러난 흰 손등 위에 천천히 입술을 묻었다. 묻어난 감정은 경애이기도, 공경이기도, 연심이기도 하였기에.
“그저 이루겠습니다.”
소리 내어 웃으셨던가. 귓가를 울리던 것이 그분의 웃음소리였던가. 혹은 물결이 흐르는 소리였던가. 아무렴 상관없었다. 피하시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인내는 저의 몫이다. 매화는 그저 땅에 뿌리를 박아 서고, 다가설 봄을 기다릴 것이다.
검은 하늘에 주홍빛 은하수가 쏟아졌다. 소망을 담은 빛들이 별빛이 되어 반짝였다.
저 별들 사이에 제 것은 없었다.
간절하디 간절한 제 소망은 이곳에 있었다. 눈앞에. 손 뻗으면 이리 닿을 수 있는 곳에.
지금은 그저,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그리하면, 나는 더는 무엇도 바랄 것이 없으리.
- 간절한 소망(所望). 담아. 나의 연정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