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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영(추부인)과거에 대한 날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모든 문제는 한 가지 사실에서 출발한다. 추영의 삶과 ‘그것’이 너무 가깝다.

 

 

 

 

 

  2

 

  화산은 검문이라는 말은 비단 검수에게 하는 말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추영은 닭 뼈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반으로 잘라내는 중식도를 겁도 없이 텅텅 내리친다. 생선 뼈는 조각도 나지 않고 그대로 뚝 잘린다. 잘린 생선을 한 구석으로 밀어둔 추영은 버릇처럼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기다 한껏 인상을 쓴다. 민물고기 비린내가 한 가득이다. 그릇을 씻으려 모은 물에 손을 담그고 박박 문지르는 사이 문을 열고 들어온 장숙수가 과장된 한숨을 쉰다. 아이고, 아이고. 추영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묻는다. 또 무슨 일이십니까? 추영의 옆에 자리 잡고 앉은 장숙수가 내려놓은 중식도를 쥐고 투덜거린다.

  도사라더니만 먹는데 도가 터서 도사인 모양이야. 추영은 재미없는 농담에 하하 소리 내 웃는 척을 한다. 또 쌀이 떨어졌습니까? 장숙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추영이 자르려 둔 생선을 반으로 토막 낸다.

 

  “상인이 다녀간 지 얼마나 됐다고요.”

  “좀 되기야 했지. 원래는 어제 왔어야 하지 않았나?”

  “벌써 그리되었습니까.”

 

  장숙수는 칼끝으로 도마를 통통 두드리며 날짜를 가늠한다. 보름은 넘었고, 스무날은 아직 안 되었나? 추영은 가만히 생각하다 고개를 젓는다. 스무날은 지났지요. 서른날은 아직 안 지났을 것이고……. 장숙수는 짧게 혀를 찬다. 이 멧돼지 같은 도사들을 보았나. 진심이 섞인 탄식에 추영은 그 또한 진심으로 웃는다. 잘 먹으면 좋지요. 가벼운 대꾸에 정해진 답이 돌아온다. 적당히 잘 먹어야 좋지. 추영은 생선 비린내를 닦아낸 손을 앞치마에 슥 닦고 일어난다.

 

  “장에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추영은 손을 등 뒤로 돌려 앞치마를 푼다. 장숙수의 시선이 추영을 향했다가 곧 문밖을 향한다. 들고 올 짐이 많을 것인데, 혼자 갈 수나 있겠나. 추영은 질끈 묶어 올린 머리카락을 풀어 정리하며 대답한다. 밖에 도움 청할 이들이 저리 많은데 혼자 갈 것을 걱정하십니까. 장숙수는 땀에 젖은 이마를 손등으로 훔치며 웃는다. 누굴 말씀하시나. 응? 은근하게 나오는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추영은 벗은 앞치마를 벽에 걸친다.

 

  “재경각주께서 시간 날 때 한 번 들려달라 했으니 가는 김에 여쭤보려 합니다. 재경각에서 함께 가 주신다면야 일 두 번 할 것 없이 편하지 않습니까.”

 

  장숙수는 긴 한숨을 쉰다. 실망한 기색이 느껴지는 탄식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넘긴 추영은 더러워진 앞치마를 툭툭 턴다. 벌써 이것도 빨아야 할 때가 됐나. 시간을 가늠하듯 추영은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습기와 열기를 머금고 불던 바람이 어느 순간 건조한 모래 먼지를 몰고 빈 마당을 지나간다. 계절이 지나가는 것이 빠르다. 어미의 품에 안겨 울기나 할 줄 알던 것이 현영의 손을 잡고 한 걸음씩 걸음을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추영은 물이 말라 건조한 손등을 문지르며 더 필요한 것이 없겠느냐 묻는다.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으니 손 가볍게 오라 하는 말이 돌아온다.

 

  간 김에 좀 놀고 오고. 거, 밖은 가을이어도 여기는 봄인 듯 한데.

  추영은 장숙수의 너스레를 피해 빠르게 지나간다. 뜨거운 아궁이의 열기가 곧 가을로 넘어가는 바람에 날려 사라진다. 추영은 새빨갛게 달아올랐을 것이 뻔한 뺨에 손등을 댄다. 열이 오른 것처럼 살갗이 덥다. 빙궁의 검수들은 몸을 차게 식히는 법을 안다고 하는데, 그 방법이나 알았으면 좋겠네. 추영은 손바닥을 곧게 펴 부채질한다. 건조한 바람에 목덜미를 타고 흐르던 땀이 금방 마른다.

  임시로 세운 재경각은 가장 구석에 위치한다. 곳간은 원래 어디 구석에 처박아두고 아무도 못 오게 하는 것이지. 현영의 말 한마디에 위치가 정해졌다던 재경각은 그 위치에 비해 사람이 많다. 주로 재경각의 일을 돕는 화산의 제자들이 이곳을 드나들었고, 화산의 돈을 받는 상인과 장인들이 드나들었으나 그게 아닌 경우도 있다.

  추영은 뒷짐을 지고 서 초조하게 제 손끝을 만지작거리는 뒷모습을 올려본다. 장문인.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지 못한 듯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추영은 문을 막고 선 운암의 뒤에 서 한 번 더 그를 부른다. 운암은 뒤늦게 고개를 돌리며 어색하게 웃는다. 아이고. 추영은 평소보다 과장되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운암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오랜만입니다, 추숙수.”

  “무엇이 오랜만입니까. 아까도 뵙지 않으셨습니까.”

 

  하하. 운암은 어색하게 웃고 그렇습니까, 하며 말꼬리를 늘인다. 그러게요. 아까도 뵈었네요. 추영은 그 낯이 뻔하다 생각한다. 재경각 앞에서 초조하게 제 손톱이나 잡아 뜯는 화산의 제자는 제법 그 수가 많다.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썼으니 제발 주머니를 다시 채워달라 말하기가 민망하기야 하지. 추영은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장문인께서도 주머니 걱정을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운암은 단정하게 묶어 올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쉰다.

 

  “장문인 주머니만큼 아래에 큰 구멍이 난 주머니도 없는 줄 알았으면 대제자 노릇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번에는 당가에서 한철을 제련하는데 조금 부족한 것 같다 하며 제 주머니에서 은자를 털어갔습니다. 청명이나 재경각의 도장은 무서워서 말을 못 걸겠다고 하는데 별수 있겠습니까. 운암은 피곤한 낯을 쓸어내린다. 운공이에게 또 무슨 소리를 들어야 할지……. 추영은 소리를 낮춰 웃는다. 장문인. 장난기가 얼핏 섞인 목소리가 은근하게 나온다.

 

  “제가 도와드리면 장문인께서도 저를 도와주시겠습니까?”

  “제가 추숙수를 도와드릴 것이 있겠습니까.”

  “짐을 좀 날라야 합니다. 상인이 다시 찾아오기도 전에 쌀알을 다 먹어 치운 덕분에요.”

 

  그리 해주시면 제가 재경각주께 은자를 받아 드리겠습니다. 장문인의 몫까지요. 작은 목소리를 들으려 고개를 숙였던 운암이 곧 소리를 내 웃었다가 급히 목소리를 낮춘다. 추숙수께서 이런 제안을 하실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가 빠르게 나온다. 추영은 물기가 마른 손을 재경각 문 위에 얹는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운암은 힐끗 문 안을 넘어보듯 시선을 돌리고 말한다.

 

  “운검이에게 부탁하지 않으시고요.”

 

  추영은 느긋하게 올리고 있던 입꼬리에 힘을 준다. 무너질 뻔한 웃음기가 금방 제 자리를 찾는다.

 

  “장문인께서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굳이 다른 이를 찾아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답을 듣기 전 추영은 재경각 문을 열어젖힌다. 날이 선 목소리가 날아온다. 바쁜 일 아니면 가십시오! 추영은 문 앞에 두 손을 모으고 선다. 백상도장, 저 추숙수입니다. 목간 위에 푹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상이 고개를 든다. 피곤한 낯 위로 얼핏 웃음기가 서린다. 죄송합니다. 또 조걸이 그놈인 줄 알았습니다. 아까부터 자꾸 주머니가 텅텅 비었다며 우는소리를 하며 찾아와서 몇 번 쫒아내느라……. 백상은 눈가를 꾹꾹 누르고 자세를 고쳐 앉는다. 백상의 탁자 앞에 선 추영은 그 얼굴 위로 현영이 보이는 것 같다 생각한다.

 

  “괜찮으십니까.”

  “보시는 것보다는 괜찮습니다. 이제 적응이 되었어요.”

 

  재경각이 안 바쁜 때가 있겠습니까. 검만 안 들었다 뿐이지 여기도 전쟁통인데요. 백상은 먹이 묻은 손끝으로 눈가를 매만지고 고개를 든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 구석까지 오셨습니까? 백상의 눈이 가늘어진다. 제발, 제발 아무 일도 없다 해주십시오. 간절한 목소리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 미안해질 정도라 추영은 긴 한숨 끝에 입을 연다.

 

  “재경각주께서 시간이 날 때 들러달라 하기도 하셨고, 또……무슨 일이 생겨서 미안하지만 벌써 쌀독이 바닥을 보여서요.”

 

  무슨 일이 나 죄송합니다. 추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상이 탁자 위에 고개를 처박는다. 처먹을 줄이나 아는 멧돼지 새끼들. 추영은 그 멧돼지들 사이에서 그리 티가 나지 않는 백상의 모습을 잠시 떠올렸으나 모른 척하기로 한다. 곧 비척비척 고개를 든 백상이 미리 준비한듯한 은자를 꺼낸다. 아마 운공장로님께서도 같은 이유로 추숙수를 부르셨을 겁니다.

 

  "이번에 은하 상단에서 닷새 정도 늦게 도착할 것 같다 연통이 와서요.“

 

  호북을 지나오는 길에 산사태가 났다 합니다. 아주 되는 일이 없습니다, 되는 일이. 백상은 버릇처럼 붓끝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린다. 멀리 튄 먹 몇 방울 위로 새로운 검은 점이 생긴다. 백상은 옷소매로 대강 튄 먹을 닦아내며 말한다. 그래서 이 근처에서 웃돈을 주고 먹을 것을 구해야 할 성싶습니다. 태상장로께서 아시면 아주 기겁하시겠으나……. 백상은 말하며 힐끗 문밖을 본다. 목소리가 낮아진다. 어쩌겠습니까. 산사태가 났다는데 그걸 타고 넘어오라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추영은 나지막이 웃는다. 화산 분들이라면 가능하실 것도 같은데요. 던지는 농에 백상이 인상을 찌푸린다.

 

  “그런 소리 마십시오. 될 것 같은데 진짜 하자 하는 놈이 하나 있지 않습니까.”

  “입을 조심하겠습니다.”

 

  농을 하듯 가볍게 말하며 추영은 등 뒤로 자연스럽게 손을 모은다. 너는 꼭 거짓말이 손에서 티가 나는 것을 아느냐. 오랜 시간에도 바래지 않은 기억이 의외의 순간에 도움이 된다. 추영은 한쪽 손바닥으로 손가락 끝 전체를 감싸 쥔다. 목소리는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담담하게 나온다.

 

  “값을 조금 더 쳐주실 수 있겠습니까.”

  “……화산의 재경각은 그리 만만치 않습니다. 숙수께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유가 있어야 할 겁니다. 백상은 안경을 고쳐 쓰는 시늉을 한다. 추영은 그 행동이 현영과 아주 똑같다고 생각한다.

 

  “장강의 상인들이 값을 한 번에 올렸습니다.”

 

  장강변에 무인들이 모이니 자연히 상인들의 발걸음이 줄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미 값이 올랐는데, 상인들이 그도 모자란 지 저들끼리 도모해 값을 더 올렸다 합니다. 추영은 은자 주머니를 내려보며 말한다. 그러니, 부족할 것입니다. 남으면 다시 재경각에 가져다 두겠습니다. 추영은 기다린다. 화산의 재경각은 만만찮다 당당하게 말하였으나 현영에 비해 백상은. 그리 어렵지는 않지. 백상은 가만히 추영의 눈을 올려본다. 추영은 가볍게 웃는다.

 

  “한 푼이라도 남으면 학이 입에 넣어 주십시오.”

 

  그 작던게 벌써 걸어다니던데. 그래도 질문 몇 가지는 더 던질 것을 예상했으나, 백상은 더 캐묻지 않는다. 어설픈 변명을 믿은 것인지, 혹은 믿어주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지 않나. 추영은 손이 떨리지 않길 바라며 탁자 위에 올라간 은자 주머니 두 개를 쥔다. 백상은 그 재빠른 움직임에 시선을 두지 않는다. 추영의 얼굴을 올려보는 시선이 가느다란 웃음기를 머금는다. 그래서. 백상은 다시 한번 붓끝으로 탁자를 톡톡 치며 묻는다.

혼자 다녀오실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사숙께서 같이 가십니까?

  잠시 말문이 턱 막힌다. 별다른 단어 없이 나온 두 글자가 답답하다. 추영은 억지로 목소리를 끄집어낸다. 장문인께서 도와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백상의 시선에 은근한 실망감이 스친다. 아, 그렇습니까. 추영은 입꼬리를 올린다. 그럴싸하게 웃기는 했는지 알 수 없다.

 

  “화산파 장문인을 이리 써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 화산의 입으로 들어갈 것이니 그놈들이 잘못한 것으로 합시다.”

 

  모자라시면 찾아오세요. 제 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태상장로께 들키지 않도록 해보겠다 하는 말에 추영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고 재경각 밖으로 나온다. 햇빛 아래에서 선 운암이 소리를 죽여 말한다.

 

  “숙수께서 이런 재주가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추영은 등 뒤로 모든 손을 주무르며 말한다.

 

  “장문인께서만 알고 계세요.”

 

  운암은 고개를 끄덕이고 추영의 옆에 서서 걷는다. 근데, 정말 제가 갑니까? 추영은 그 질문에 답하는 대신 은자 주머니 하나를 운암의 품에 안겨준다.

 

 

 

 

 

  3

 

  추영에게 처음 찾아온 ‘그것’은 어머니의 손을 쥐고 춤을 추며 멀어졌다. 젖먹이를 두고 그 어미 눈이 감기기나 했겠냐 말하는 한탄을 들으며 어린 추영은 아버지를 올려봤다.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린 추영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추영은 그때 ‘그것’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그것’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추영이 첫 번째 혼인을 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추영을 찾아왔다. 첫 번째 아이를 손아귀에 낚아챈 ‘그것’이 한 번 더 춤을 추며 추영을 떠났다. 원래 첫애는 바다를 건너는 조각배 같은 것이라 이리 잃을 수 있다고 말하는 다정한 목소리에 추영은 울지 않았다. 아직 그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던 뱃속의 무언가가 사라졌구나. 슬픔이라기에는 허전함에 가까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으면 그가 와서 추영의 손을 잡아주곤 했다. 그 다정함이면 괜찮았다. 추영은 그때까지도 ‘그것’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세 번째로 찾아온 ‘그것’은 추영의 두 번째 아이를 안고 한 번 더 추영을 떠났다. 돌이 지나지도 않은 작은 몸을 떠난 영혼이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불교에서는 혼이 환생을 거듭하다 부처가 된다고 하는데. 도가에서는 생을 가진 것은 자연히 사로 흐른다 하는데. 그냥 무작정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를 해주는 곳은 없나. 조건 없이 그저 행복한 사후를 이야기하는 곳이 있다면 그 이야기를 믿을 텐데. 추영은 울음을 토해내며 생각했다. ‘그것’이 지독하게 슬펐다. 뼈가 시릴 정도의 슬픔이었다.

  ‘그것’이 그를 앗아갔을 때, 추영은 처음으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아버지는 두렵고, 슬프고, 화가 나고, 비통하고 동시에 막막했구나. 한 걸음을 걷기가 힘이 들어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구나. 빠져나온 기침이 몸 안으로 다시 들어가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추영의 귀에 들어왔다. 단내가 나는 학의 배냇머리에 얼굴을 묻은 추영은 울지 않았다. ‘그것’이 현실로 다가왔다. 추영은 ‘그것’을 이겨내야 했다.

  그게 불가능함을 그 순간 알았다.

  그 시커먼 그림자는 꼭 ‘그것’처럼 보였다. 저것은 분명히 사람인데. 학을 끌어안은 추영은 뒷걸음질을 치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추영은 시커먼 그림자와 ‘그것’을 피해 막무가내로 달렸다. 어디를 향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고, 바닥으로 넘어진 추영 위로 천장의 붉은 널빤지가 떨어졌다. 추영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좁은 틈 사이로 시커먼 그림자가 내려보는 것이 느껴졌다. 추영은 그 순간 ‘그것’이 자신과 함께함을 느꼈으나.

  그림자는 방향을 돌려 멀어져갔다. 추영은 얼이 빠진 표정으로 그 좁은 틈을 올려보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품 안에서 학이 울음을 터트렸다. 비명에 파묻힌 울음소리가 유독 작게 들렸다. 학을 품에 안아 달래며 추영은 두려움을 느꼈다.

 

  추영은 ‘그것’이 죽도록 무서웠다.

 

 

 

 

 

  4

  백상에게 한 것은 거짓말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거짓말이 아니게 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절반에 샀다고 말하는 추영에게 상인은 그리 미안하게 보이지 않는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야, 수로채에서 물길마저 틀어막기 전이고요. 또한 호북에 내린 비로 산길이 죄 막히기 전이지요. 사방으로 길이 막혔으나 안에 고인 것의 값이 오르지 않겠습니까. 낯이 익은 상인은 그래도 제 것을 사는 것이 가장 싸다 말하며 덧붙인다. 내 화산에게 진 빚이 있어 숙수께 조금 더 얹어 드리는 것입니다. 우기기도 힘들 정도로 단호하게 하는 말에 운암은 슬그머니 제 주머니로 들어갔던 은자를 도로 꺼내놓는다. 장문인의 것이 아닙니까. 짜증으로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꾹 누르며 하는 말에 운암은 느리게 고개를 젓는다. 제 것이 아니라 화산의 것입니다. 고리타분한 말이고, 고마운 말이다. 추영은 등 뒤에서 내미는 은자를 받아든다. 남은 것은 꼭 장문인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운암은 되었다고 말한다.

  포기하고 원하는 대로 값을 쳐줄 테니 있는 것을 전부 달라는 말에 상인은 함박웃음을 짓는다. 역시 숙수께서 물건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괜히 띄워주는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무시한 추영은 턱턱 쌓이는 가마를 내려보며 나지막이 혀를 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돈이면 다섯 가마는 살 수 있었을 텐데. 현영이 알았다면 아주 난리가 났을 거라는 확신과 함께 미약한 두통이 밀고 들어온다. 추영은 이마를 꾹 누른다. 통증이 사라지는데 큰 도움은 되지 않았으나 기분이 나빠졌음을 드러내는 데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상인은 눈치를 보며 값을 조금 깎아 줄 테니 다음에도 찾아 달라 말한다. 추영은 거짓임이 그리 티 나지 않는 방식으로 웃는다. 손바닥으로 가린 입술은 여전히 직선이다.

 

  “그리 해드리겠습니다.”

 

  은하상단이 오기만 하면 다시는 장강변의 장에는 발길을 하지 않겠다 마음먹은 추영은 값을 치른다. 가벼워진 주머니가 씁쓸하다. 느린 한숨을 내쉬는 짧은 틈 사이에 쌓인 쌀가마를 등에 짊어진 운암이 어색한 낯으로 웃는다. 어쩌겠습니까. 필요한 것인데요.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추영은 그 다정한 말에 답하는 대신 남은 은자를 내민다.

 

  “약속대로 남은 것은 장문인께 돌려드리겠습니다.”

  “이미 드린 것을 어찌 받겠습니까.”

  “그러는 저는 이미 드린 것을 받지 않았습니까. 장문인께서도 받아주셔야 제가 덜 부끄럽지요.”

 

  고집스럽게 운암의 소매 안으로 주머니를 밀어 넣은 추영은 그가 주머니를 돌려주기 전에 재빨리 돌아 걸어간다. 등 뒤에서 운암의 유독 느린 발소리가 들린다. 추영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한다.

 

  “장강변은 물건이 들어오기 쉬워 값이 싸다고 했는데 그도 옛말인 듯 합니다.”

 

  세상이 험하여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해야 할지, 원……. 추영은 강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다. 옆에 나란히 선 운암이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기억하는 것과 너무 달라 놀랐습니다.”

  “장문인께서 쌀값을 기억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화산의 일대 제자들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화음으로 내려가 값을 흥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운암은 추억을 되짚어가듯 가벼운 투로 말한다. 다행히 섬서 땅은 비옥한 편이라, 흥정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배 곪지 않을 정도는 되었습니다. 추영은 그 말에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라 그렇습니까 하고 입을 다문다. 운암은 그의 이대 제자 시절을 연상시키듯 장난스럽게 웃는다. 운검이가 그걸 잘했습니다. 대답을 내놓기 전에 운암이 오래된 이야기를 한다.

 

  “인상이 조금 사납지 않습니까. 가서 팔짱을 끼고 가만히 내려보고 있으면 값이 뚝뚝 떨어진다 하여 저희가 도복을 벗겨서 내보냈습니다. 그걸 안 태상장문께서 도사라는 놈들이 잘 한다며 경을 치셨죠.”

  “……태상장문께서 경을 치실 줄 아는 분이신 줄 몰랐습니다.”

  “칠 줄 아는 분이셔서 다행이죠. 저나 운검이나 덕분에 도사 노릇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추영은 불편한 이름에 어찌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문다. 시장의 소란이 파고들기에는 무거운 그 침묵을 운암이 깬다. 숙수, 답하고 싶지 않으시면 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추영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답한다. 무엇을 물으려 하시기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무섭습니다. 웃음기가 섞인 말에 대한 답으로 웃음기 하나 없는 말이 돌아온다.

 

  “혹 섬서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면 은하 상단에 자리를 마련해보겠다 전해드리라 하여.”

 

  전해 달라. 운암의 머릿속에서 나오지 않은 말의 끝이 흐지부지 무너진다. 그 말의 주인이 뻔하다. 그간 피해 다니느라 바빴던 얼굴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추영은 답을 하지 못한다. 운암은 말의 주인을 대신해 허둥지둥 말을 늘어놓는다. 피해 달라는 뜻도 아니며, 다른 선택을 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며……. 그 어떤 것도 아니라는 말이 길다. 추영은 그 긴말의 허리를 뚝 끊는다.

 

  “생각해보겠다 전해주시겠습니까.”

  “……좋은 의미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정말 좋은 의미로.”

  “오해 안 합니다, 장문인.”

 

  추영은 아주 잠깐 고민을 한 뒤 말한다.

 

  “화산으로 가면 아주…….”

 

  ……좋겠네요. 학이가 좋아할 것입니다. 현영 태상장로님을 어찌나 잘 따르는지 꼭 친손자처럼 굴어서 민망할 정도라. 운암은 과장되게 웃는다.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현영사숙께서는 요즘 학이 보는 맛에 일어나시는 분이십니다. 적적한 말년에 손자 하나 들이신 것으로 생각하고 계실지도 몰라요. 추영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추영은 본 적 없는 화산을 상상한다. 운검의 말에 따르면 햇빛에 비칠 때마다 희게 빛이 나 빛난다는 의미의 화를 쓴다는 그곳은 봄이 되면 매화가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이 되면 새파란 하늘이 찬란히 빛나며 가을이 되면 온갖 색으로 물드는 것이 장관을 이루고 겨울이 되면 오직 흰 봉우리와 그 안에 선 사람만 있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기꺼이 모든 이에게 손을 내미는 이들이 있다. 추영은 그 사이에서 생을 살아내는 것이 탐이 난다. 처음에는 탐이 났으나 그것을 탐해도 되는지가 의심스러웠고, 지금은. 이것을 두려움이라 말하는 게 옳을까. 추영은 확신하지 못한다.

 

  추영은 운암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의 주인을 떠올린다. 운검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함께 섬서로 가신다 하면 다 좋아할 텐데요. 

 

  그 ‘다’에 누구까지 포함이 될까. 학은 분명히 포함될 터였다. 옹알이만 해도 신기하다며 학자를 시켜야 한다, 도사를 시켜야 한다, 관리를 시켜야 한다 떠드는 이들이 곁에 있었다. 하루종일 학을 품에 안고 다니며 어르고 달래는 이도 있었고, 모른 척 다가와 그 작은 손에 제 손가락을 넣고 슬며시 웃는 이들도 있었다. 학에게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 것이라 추영은 확신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추영은 차갑게 생각했다. 중원 땅이 제아무리 넓다 하나 어린아이를 데리고 홀로 다니는 부인을 거두어 주는 곳은 많지 않다. 그중에서 사람대우를 해주는 곳을 고르자면 손에 꼽겠지. 머리를 아무리 차게 식혀도 세상이 더 찼다. 추영은 결론을 내렸다. 화산으로 가면 몸이야 아주 편할 것이나.

 

  마음이 편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추영은 운검에게 내놓았던 대답을 그대로 운암에게 한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생각이 느려 그런가 봅니다. 운암은 낮은 목소리로 웃는다. 저도 생각이 느리다는 말을 자주 들어 이해합니다. 추영은 그가 이해하는 것이 어느 쪽인지 고민한다.

 

 

 

 

 

  5

 

  운검은 세간의 기준에서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추영은 단지 잘 보이기 위해 눈앞에서 좋은 사람인 척하는 것과 정말 좋은 사람을 구분할 만큼 많은 사람을 만나왔다. 운검은 명백하게 후자였다.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학을 끌어안고 잔해 속에서 빠져나올 때부터 그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 좋은 사람이 더 좋은 사람이 되려 애쓰는 모습을 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추영은 운검이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일 때가 특히 즐거웠다고 기억했다. 화산으로 들어오는 모든 것이 그렇듯 산처럼 쌓여 들어올 때 그 한 팔로 기어코 추영의 짐을 가져가려 할 때가 그랬다. 제가 들 수 있습니다. 사실을 말하는 추영에게 운검은 다정을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검을 쥘 때처럼 빠르게 추영의 몫까지 한 번에 든 운검이 변명처럼 말했다. 화산에서 수련용으로 쓰이는 바위를 보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숙수께서 드실 수 있는 것이면 저에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저가 더 드는 것이 옳다 말하며 운검은 쌓인 물건을 위태롭게 들었다. 도장! 짧게 나온 외침보다 땅이 보리알을 잡아 당기는 것이 빨랐다. 주울 수도 없는 작은 알갱이가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졌다. 운검은 얼어붙었고 추영은 다급히 바닥에 주저앉아 주울 수 있는 것을 주웠다.

  당장 소리라도 질러 마땅할 현영은 그저 혀를 한 번 찼다. 잘하는 짓이다, 이놈아. 거 대강 줍고 모래와 섞인 것은 닭 모이로 뿌려주거라. 추영은 치마폭으로 싼 보리알을 도로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로님. 현영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숙수께 한 말이 아니오. 현영은 곧게 운검을 내려봤다.

 

  “네가 해라, 꼭.”

 

  주울 수 없는 것을 주우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운검이 슬쩍 눈꼬리를 내렸다. 사숙. 슬그머니 나온 호칭에 현영은 웃었다. 꼭 네가 하거라, 꼭. 네가 꼭 이립도 안된 삼대제자마냥 굴다 친 사고가 아니냐. 운검은 모랫바닥을 손으로 쓸며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누르고 눌렀으나 튀어나온 웃음소리에 답하듯 운검은 입꼬리만 올렸다 내렸다.

  모래와 섞인 보리알은 현영의 말대로 닭의 모이가 됐다. 모래와 섞인 것을 다시 모랫바닥에 뿌리는 것이니 그냥 그 자리에 닭을 풀었으면 그만이지 않았겠냐 말하는 목소리가 꼭 현상이 말한 삼대 제자 운검을 떠올리게 했다. 추영은 큰 소리로 웃었다. 운검이 옆을 돌아봤다. 그러다 닭이 다 날아가 버리면 어찌합니까. 짐승이라는 것이 그 영물처럼 다 똑똑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다가는 아마 장로님께서 그 닭 다 데리고 올 때까지 잘 생각은 하지 말라 경을 치실텐데요. 운검은 괜히 바닥에 보리알을 한 번 더 뿌렸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 같아 듣기 좋았다. 그 소리에 학이 손을 뻗었다. 칭얼거리는 소리에 운검이 추영의 등 너머에서 내민 작은 손을 내려봤다. 네가 하고 싶으냐. 학은 대답하듯 옹알이를 했다. 운검은 소리를 낮춰 웃으며 모래와 보리알이 섞인 것을 학의 작은 손에 쥐여줬다. 그 닭 모이는 그대로 학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 그걸 왜 먹느냐!”

  “네?”

 

  운검이 비명처럼 말했고, 추영은 기겁했으며, 학은 큰 소리에 놀라 울음을 터트렸다. 엉망진창이었다. 큰 소리에 놀라고, 입 안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생 보리알과 모래 알갱이에 더 놀란 학은 한참을 울고 나서야 겨우 진정했다. 퉁퉁 부은 얼굴을 내려보며 운검은 진이 빠진 얼굴로 허탈하게 웃었다. 다시는 내가 네 손에 뭘 쥐여주는 일은 없을 것이다. 네가 자초한 일이라며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지우는 손이 다정했다.

  그리 말한 사람치고 운검은 학에게 많은 것을 쥐여줬다. 하루는 아직 이도 나지 않은 아이가 먹지 못하는 당과를 쥐여줘 추영을 당황하게 했고, 또 하루는 세간의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논다는 천 인형을 가지고 와 흔들어 학을 당황하게 했다. 처음 보는 흰 천 뭉치를 본 학은 제 당황함을 토해내는 것으로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음을 주장했다. 제가 이 아이를 가장 많이 울리는 것 같습니다. 운검은 눈치를 보듯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잠이 든 학이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고개가 조금씩 더 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원래 어린 아기라는 것이 잘 웁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어찌 신경을 안 씁니까.”

  “저러다가도 곧 제 것이라며 손에서 놓지 않기도 합니다.”

 

  보십시오. 추영은 학의 손에 잡힌 천 인형을 한 번 툭 잡아당겼다. 손아귀 힘이 센 아기의 손에 잡힌 것이 팽팽하게 늘어난다. 내일이면 아주 제 살가죽처럼 가지고 다닐 것입니다. 전에도 그랬다 하는 말에 운검은 그제야 웃었다. 그렇습니까. 운검은 슬쩍 천 인형을 툭툭 잡아당겼다.

 

  “손아귀 힘이 센 것이 검수를 해도 잘하겠구나.”

 

  뺨을 톡 건들며 하는 말에 악의는 없었다. 악의 없이 휘두른 검도 사람의 살갗을 벨 수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추영은 날카롭게 대꾸했다.

 

  “저는 이 아이가 무인과는 관련 없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

 

  운검은 당황한 낯을 숨기지 못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화산에서는 흔히들 하는 말이라 제가 조심치 못한 모양입니다. 변명을 삼키는 입술이 곧 약간 벌어진 채로 멈췄다. 죄송합니다. 추영은 깊게 잠들어 굳게 닫힌 눈꺼풀을 내려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냥, 다음부터 그리 말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운검은 한참 말없이 학을 내려보다 돌아갔다. 추영은 무인의 삶을 오래도 견뎌온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으나 물어보지 않았다. 인기척에 칭얼거리는 학을 안아 달래며 추영은 그 체온에 뺨을 묻었다. 검을 쥐는 이는 제 생을 그 손끝에 거는 이라 하지 않더냐. 추영은 그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을 학에게 이어 말했다. 너는 네 생을 네 손끝에 걸지 말거라. 그렇다면 생을 어디에 거는 것이 옳을까.

 

  추영은 그 답을 내리지 못했다.

  추영의 아버지는 먹을 만드는 이였다. 어디에도 쓰이지 못할 만큼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를 베던 뒷모습이 아직도 종종 생각이 났다. 자른 소나무를 등에 진 그는 추영에게 손을 뻗으며 발아래를 조심하라 말했다. 아래를 봐야지. 추영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대신 추영은 새까맣게 먹으로 물든 그의 손을 보며 산에서 내려왔다. 그 손에서는 늘 소나무를 태울 때 나는 향내가 났다. 추영은 그 향을 아주 좋아했다. 그 향이 그의 목을 쥐고 선 것을 몰랐다면 아직도 좋아했을 텐데.

  추영의 아버지는 기침을 하다 쓰러졌다. 의원은 그것을 폐병이라 말했다. 오랫동안 연기를 마셔와서 걸린 병이니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하는 그 목소리가 담담했다. 먹으로 쓴 글씨로 가득한 의서를 몇 장 넘긴 그는 약이라며 주섬주섬 흰 보자기에 담아 내밀었다. 그는 그것을 다 먹기도 전에 생을 마감했다.

  학에게 성을 물려준 사내는 생을 붓에 건 이였다. 사람의 머리카락보다 얇은 동물의 털을 모아 나무 대에 연결하는 그 과정을 그 무엇보다 귀하게 여긴 이는 털을 모아 만든 것을 가끔 보여주곤 했다. 부인. 이게 가장 값을 많이 쳐주는 족제비 털입니다. 바람이 스치는 것처럼 부드러운 털을 손으로 문지르다 보면 종종 그가 왜 고작 털 몇 가닥에 그리 열을 올리는지 알 것도 같았다. 평생 손끝에 이런 바람이 느껴지는 삶이라면 그 또한 나쁘지 않겠단 생각을 했다. 어린 딸은 종종 그 털에서 나는 먼지에 재채기를 했다. 작은 목소리가 귀여웠다. 그는 추영과 함께 웃으며 어린 딸의 코 끝을 톡톡 건드렸다. 에취. 나오는 그 목소리가 어떤 신호인 것을 알았다면 절대 그것을 귀여워하지 않았을 텐데.

  어린 딸은 기침을 하다 죽었다. 어린아이가 죽는 이유야 한 두 가지가 아니니 어찌 알겠냐 말하던 의원은 사내가 쓰러진 뒤에야 놀라 달려왔다. 폐병이라고 했다. 동물의 털에서 나오는 먼지와 나무 대를 깎으며 나오는 먼지를 너무 많이 마신 것이 원인이 아니겠느냐 말하는 목소리에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붓으로 쓴 의서를 몇 장 넘기고 약재를 내밀었다.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추영은 그러지 못할 것을 이미 알았다.

  그는 마지막 하루치 약재를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추영은 깊은 잠에 든 학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속삭였다. 검도 쥐지 않아야 할 것이고, 먹도 쥐지 말아야 할 것이고, 붓도 쥐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럼 네 손에 남는 것이 무어가 있을까. 추영은 가느다란 배냇머리를 쓸어 넘기며 운검의 하나 남은 팔을 생각했다.

  마지막 약재까지 모두 삼키고 살아남았다는 이는 다시 검으로 돌아갔다. 겁도 없지. 추영은 두 남자의 삶 위에 운검의 삶을 덧씌웠다. 만약 두 사람이 마지막 약재까지 모두 삼키고 살아남았다면 어찌했을까. 두 사람도 다시 먹을 만들고, 붓을 만드는 삶으로 돌아갔을까. 추영은 먹으로 물들어 늘 까맣던 손을 아직 기억했다. 나무와 털에 쓸리고 쓸려 하얗게 마모된 손도 아직 기억했다. 만약에 살아남아서 그다음 해를 봤다면. 추영은 학을 끌어안았다.

  무인의 삶을 살지 말라 가르칠 것이 아니었구나. 추영은 학의 귓가에 속삭였다.

 

  “너는 어디로도 돌아가지 말아라.”

 

  네가 그리 살지도 말고, 그리 사는 이를 곁에 두는 삶을 살지도 말아라. 추영은 한숨처럼 말하며 운검의 웃는 낯을 떠올렸다. 겁도 없이 한 팔로 돌아가 생을 살아내는 것이 아주 반짝반짝 빛이 나기야 했다만, 운검의 삶은 지나치게 ‘그것’과 가까웠다. 추영은 학을 다시 자리에 눕히며 속삭였다. 그리 사는 이를 곁에 두면 네가 아주 많이 외로워질 거란다.

  그것이 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잠이 든 아이에게 하는 말인지 추영은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다른 것 하나는 확신했다. 그리 사는 이를 곁에 두지 않아야했다.

 

  “노력해보겠습니다.”

 

  그래서 추영은 운검이 꺼낸 말이 슬프고, 동시에 우스웠다. 그 노력이 무엇일 줄 알고 저리 말을 하나. 추영은 한 손으로 내미는 주머니를 받지 않았다. 운검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럴 것을 예상한 것처럼 팔을 내린 그는 웃었다. 추영은 예의상 웃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노력이요. 질문도 대답도 아닌 것이 추영의 입술 밖으로 나왔다. 운검이 대꾸하지 않아서 추영은 그 뒷말을 이어야 할 것 같은 중압감을 느꼈다. 추영은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몇 번 씹었다. 노력이. 끝맺음을 짓지 못한 단어가 어설프게 입 밖으로 나왔다. 추영은 등 뒤로 숨긴 손을 마주 잡았다.

  추영은 그가 정말 노력을 할 사람인 것을 알았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 사람에게 쓰는 단어가 아니었나. 추영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이제 익숙해진 꽃향기가 났다. 묵직한 단내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추영은 들이마신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아주 느리게 말했다. 도장. 운검은 늘 하는 것과 똑같이 네, 하고 답했다.

 

  “삶이 노력으로 되셨습니까.”

 

  추영은 운검이 입에 담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잘린 팔, 성한 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베이고 찔린 몸뚱이, 당장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가느다란 숨에 대한 이야기를 운검은 예상보다 무던한 표정으로 했다. 저는 잘 기억하지 못하니까요. 저보다는 운오나 소소가 기억을 할 겁니다. 둘에게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운검은 웃었다. 소소도 그 이야기를 하며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추영은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며 웃는 얼굴이 예쁘던 당소소에 대해 생각했다.

  타인의 삶을 연결하려 노력하는 그 흉터 가득한 작은 손이 언제까지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을까. 그 노력이 언제까지 성공적이고, 그 노력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을까. 운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어쩌면 당소소의 그 자신감 넘치는 낯으로도 확신 할 수 없을 이야기를 추영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내놓지 않았다. 불가능을 입에 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추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와 그 불가능을 입에 담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추영은 당연한 것을 서술하듯 담담히 말했다.

 

  “생이 노력으로 이어지는 것이겠습니까.”

 

  운검은 답하지 않는다. 추영은 그가 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추영은 기어코 답을 얻어내려는 듯 한 번 더 묻는다. 제가 그 어떤 죽음도 견디지 않게 하겠다 약조하실 수 있겠습니까. 추영은 그 말을 하며 질문에 대한 의미를 자각했다. 불가능을 믿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으나, 원래 생을 가진 모든 것은 어리석다고 하지 않던가.

 

  “저는 이미 너무 많은 죽음을 감내하였습니다.”

 

  그러니 약조를 하시면 받겠습니다. 추영은 운검이 내미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매화색 고리에 흰 옥을 달아 만든 노리개는 오랫동안 시선을 두고, 탐을 낼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것을 가만히 내려보고 선 추영에게 운검은 어울린다 말했다. 안 살 겁니다. 필요하지 않습니다.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을 피해 걸어가던 그 순간이 기억난다. 추영은 그 아름다운 것이 두려웠다. 그것이 장신구든, 꽃이든, 그 안에 든 마음이든. 손에서 빠져나가는 그 순간부터 추영을 괴롭힐 그 모든 것이. 추영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검을 놓으실 수 있겠습니까.”

 

  답이 돌아올 것이라 예상하고 던진 말이 아니기에 추영은 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못하신다고 말하세요.”

 

  추영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운검은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추영은 제 말이 비수가 되지 못함을 알아차렸다. 날카롭지 않은 말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추영은 꼴사납게 그것을 주워 한 번 더 휘둘렀다. 그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운검은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추영을 따라 하듯 고개를 떨궜다.

 

  “네, 제가 어찌 그리 말하겠습니까.”

 

  패배 선언으로 들리지 않는 말이 곧게 나왔다. 대 화산파의 장로 되는 이이며, 화산을 지켜야 하는 첫 번째 검이고, 운자배의 유일한 검인데. 운검은 하나 남은 손으로 제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사실을 말하는 목소리는 떨지도, 느리거나 빠르지도 않았다. 평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목소리로 운검은 제 미래를 말했다. 제가 어찌 검을 놓겠습니까.

  추영은 생을 검과 함께 보내는 이들에 대해 세간에서 떠들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죽어도 검에 기대어 선체로 죽는 것이 검수가 해야 할 일이라 말하는 목소리에 동경이 느껴졌다. 그것이 두렵다 말하는 이들도, 그것이 멋이라 말하는 이들도, 그것이 한심하다 말하는 이들도 검수의 주변 인물에 대해 말한 적이 있던가. 세상에 오로지 검과 자신뿐인 이들이 죽을 때 그 곁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추영은 울컥 올라오는 것을 힘겹게 삼켰다. 운검이 질문을 했다. 원하는 대답이셨습니까? 추영은 고개를 들어 운검을 올려보고 빠르게 답했다. 네. 단호한 답을 내뱉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제가 원하는 답이었습니다.”

 

  추영은 등 뒤로 손을 돌려 쥐고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지나칠 정도로 정중하고 긴 인사를 마치고 허리를 편 추영은 고개를 숙여 운검과 눈을 맞추지 않고 말했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제 밤공기가 제법 싸늘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도장께서도 들어가세요.”

 

  운검이 답을 하기 전에 추영은 몸을 돌렸다. 추영의 입으로 싸늘하다 말한 밤바람이 목덜미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름이 끝났다 하기에도, 가을이 시작했다 하기에도 애매한 바람을 맞으며 추영은 제 선택이 이만하면 빨랐다 생각했다. 고작 계절 하나를 보낸 정도라면 잊히는 것 또한 계절 하나면 되지 않을까. 추영은 마음을 접어 아주 깊게 파묻었다.

  추영은 그것을 다시 열어보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많은 것을 묻은 삶에 고작 마음 하나 묻는 것이 어디 그리 어려울 것이라고. 추영은 마음과 아무 상관 없이 제 손으로 해야 할 일을 천천히 떠올렸다. 수확의 계절이 오기 전 모든 먹을 것의 값이 오를 것이니 창고를 채워야 한다 말을 올려야 할 것이고, 쌓아둔 것을 멧돼지들이 다 파먹기 전에 수십 번을 확인해야 할 것이고. 또 학이가 부쩍 활동량이 늘었으니 사고 치거나 어른들에게 불편하게 굴지 않는지 확인해야 하고. 그리고 또. 추영은 걸음을 멈췄다. 억지로 헤집은 머릿속이 어지러웠으나 생각을 멈출 만큼 어지럽지는 못했다. 추영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빨리 정리한 것이니 겨울이 오기 전에 끝나겠지. 가을만 버티면. 추영은 멈춘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6

 

  뒤늦게 추영은 그 모든 때를 기억하며 긴 한숨을 내뱉는다. 생을 가진 것은 모두 어리석다고. 스스로는 해당하지 않는다는듯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생각을 추영은 바닥에 처박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겨울이 오기 전에 끝이 날 것이라고. 접어서 파묻은 마음이니 더 이상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같이 다 틀린 생각이다.

  추영은 창백하게 질렸을 것이 뻔한 낯을 아래로 푹 숙인다. 들려오는 소문 하나하나가 날카롭다. 운자배 몇과 야수궁의 검수 몇으로 이루어진 이들이 장강 변을 습격하던 수로채와 검을 섞었다는 목소리가 멀어진다. 그 뒤로 몇이 죽었고, 몇이 다쳤냐는 질문이 이어진다. 죽은 이들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크게 다친 이는 있다 하며 그는 운자배 이야기를 꺼낸다. 도호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 이는 이내 짧은 탄성을 내뱉는다. 무각주라 했는데. 작살이 날아오는 걸 몸으로 막았다 들었소. 겁도 없지.

  제 아무리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라도 그렇지, 두 번 죽었다 살아나는 게 그렇게 쉬울 거라고.

  추영의 머릿속보다 다리가 먼저 움직인다. 의약당으로 달리듯 빠르게 걸으며 추영은 단 한 가지를 곱씹는다. 빨리 정리 한 것이라고. 추영은 등 뒤로 숨겨봐야 뻔히 알 수 있었던 장신구를 떠올린다. 흰 옥과 매화색 고리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그것이 그리 예뻤다. 추영은 그 고리를 만든 매듭 하나하나마다 걸린 제 생각을 하나씩 구겨 진창에 처박는다. 하나같이 멍청한 생각이었다.

  추영의 선택은 이미 지나치게 늦었다. 

 

  준 마음을 돌려달라 하는 것은 어찌하더라. 그게 가능하기는 했던가.

 

 

 

 

 

  7

 

  의원도 아닌 이가 달려와서 지켜보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추영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의약당 문을 호기롭게 열고 들어온 추영은 운오가 비워준 자리에 앉아 가쁜 숨을 몇 번 몰아쉰다. 천천히 머리가 제 자리를 찾는 느낌이 든다. 무엇을 하러 왔을까. 추영은 당장 일어나 할 일을 마저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불 밖으로 나온 팔 하나를 내려본다. 그 손이 차 보여서 추영은 힘없이 벌어진 손 사이에 제 손을 넣는다. 손은 생각보다 차지 않다. 문득 추영은 이 손을 한 번도 제 손으로 쥐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추영은 충동적으로 힘을 줘 운검의 손을 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깨어 계셨습니까.”

  “부상이 심할 때 억지로 잠을 재우는 약이 있습니다. 제 사질이 그걸 가지러 간다 하고 나간 것 같은데.”

 

  그걸 가지러 간다는 놈이 아무래도 약초부터 뜯고 있는 모양입니다. 운검은 속삭이듯 말하고 작은 소리를 내 웃는다. 웃을 때마다 뻐근한지 그 웃음이 금방 멎는다. 추영은 빈손으로 침상을 짚고 일어난다. 의약당주라도 불러오겠습니다. 방금 나가셨으니 근처에 계실 겁니다. 운검은 추영의 손을 퍼뜩 붙잡는다. 됐습니다. 곧 오겠죠. 부상자와 힘 싸움을 하는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어 엉성한 자세로 서 있자 운검이 한 번 더 손을 잡아당긴다. 앉으세요. 저보다 부상이 더 심한 이가 있습니다. 추영은 운오가 사라진 방향을 가만히 보다 천천히 자리에 앉는다. 운검은 그 사이 손을 놓지 않는다.

  추영은 이제 손가락 사이에 걸친 것에 가까운 왼손을 내려본다. 상처 위로 상처가 얼마나 쌓였는지 작은 생채기는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추영은 그가 그 검으로 쓴 이야기를 떠올린다. 만인방과 구파의 무당, 마교. 이제는 수로채.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 당장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가늘었으나, 아직 이어지는 것이 어찌나 기쁘던지. 추영은 입김만 불어도 떨어질 것처럼 가볍게 걸린 손을 꽉 쥔다. 굳은살로 단단한 손이 검과 다를 것이 없다.

 

  “도장께서는 왼손으로 글을 쓰는 이들이 고집이 세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제가 많이 했습니다.”

 

  백상이 어릴 적에 왼손잡이였습니다. 왼손을 쓰면 안 된다 하면 울상을 하는 것이 귀여워 장난을 좀 과하게 친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티가 나지 않죠. 제가 하도 놀려 고쳤다 했습니다. 운검은 조심스럽게 추영의 손을 마주 잡는다. 손등에 느껴지는 손끝이 무생물처럼 단단하고 생물처럼 온기가 있다. 추영은 느리게 한숨을 쉬며 운검의 부러진 손톱 끝을 매만진다. 날카롭게 뜯겨나간 것이 아주 조금씩 닳는 느낌이 든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럼 왼손으로 검을 쓰는 이는 얼마나 고집이 세다는 뜻일까 생각했어요.”

  “제가 원래 우수검을 썼던 걸 아십니까.”

 

  추영은 소리를 낮춰 웃는다.

 

  “네, 알고 있습니다.”

 

  추영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이야기를 기억한다. 한 생을 오로지 오른손으로 검을 쥐어온 이가 처음 왼손에 검을 쥐고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이 말렸다고 했다. 아직 낫지 않았으니 들어가 쉬는 것이 먼저라 말한 이도 있었고, 검을 쥐지 않아도 화산에 네가 필요할 것이라 말한 이도 있었다고. 심지어 이전만 못 할 것이며 결국 허무만 남지 않겠느냐 말한 이도 있었지만 다음날이면 또 왼손에 검을 쥐고 나타나 모두를 단념시켰다 했다.

  우수검을 써온 당신 또한 충분히 고집이 센 것 같은데. 추영은 잘 알고 있다 한 번 더 대답하고 시선을 돌린다. 이불 밖으로 나온 어깨와 목, 팔까지 성한 곳이 하나 없었으나, 이 또한 성한 편이라 운검은 말한다. 보시는 것보다 괜찮습니다. 그리 살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추영은 빈 오른팔 자리를 내려보며 묻는다.

 

  “안 아프십니까.”

 

  유치한 질문에 운검은 오래 고민하고 답한다. 아파서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던 적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요. 운검은 나지막이 웃는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길을 겪고 살아있으며, 아직 한 팔은 남아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추영은 침상에 고개를 묻는다. 웃음이 나온다. 왜 웃음이 나오는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다. 저것이 원하던 답이었나? 추영은 정답까지는 아니지만, 오답이라 하기에는 듣기 좋은 말을 곱씹는다. 살아있으며, 또한 남은 것이 있다면.

  추영은 불완전한 가정 대신 그가 걸어온 길에 걸어보기로 한다.

 

  “다른 약조를 해달라 하시면 그것은 들어주시겠습니까.”

  “어떤 것입니까.”

 

  추영은 이불에 눌러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그냥 알겠다고 한 번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운검은 제법 단호하게 말한다. 무엇인지 들어는 봐야겠습니다. 검을 놓아달라는 말은 아닌데도요. 운검은 끝까지 원하는 말을 내놓지 않는다. 추영은 역시 왼손을 쓰는 이가 고집이 세다는 속설은 틀린 말이 아니라 생각한다. 추영은 이불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말한다.

 

  “돌아올 것이라 말하세요.”

 

  생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검이라도 돌아오겠다 말하세요. 추영은 아주 오래전 상실을 겪었을 때 어느 여인이 한 말을 떠올린다. 마음에 묻으면 된다 한 그 말을 추영은 이제야 알 것 같다 생각한다. 품는 것과 묻는 것이 뭐가 다를까. 모두 마음이 하는 일인데. 어딘가에 묻고, 곁에 두어서 후회한 적이 있었나. 추영은 운검의 손을 잡아당긴다. 말하세요. 운검은 그답지 않게 더듬더듬 말을 내놓는다.

 

  “……돌아오겠습니다.”

 

  이것이면 되겠습니까. 추영은 침상 위로 허리를 숙인다. 급히 달려오느라 다 풀린 머리카락 몇 올이 운검의 얼굴 위로 떨어진다. 의아한 기색이 보이는 얼굴을 내려보며 추영은 웃는다. 내 모든 이야기를 설명할 만큼 긴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설명하지 못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추영은 설명을 포기하고 고개를 내려 답한다. 네, 그것이면 되겠습니다. 초점이 맞지 않을 만큼 가까운 얼굴이 뻣뻣하게 굳는 것이 느껴진다. 추영은 굳은 양 뺨을 두 손바닥으로 감싸고 운검이 내뱉은 숨을 들이마신다. 약조한 것은 지키셔야 합니다. 추영은 마른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갠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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